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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곽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모시 毛詩〉에 보이는 한후의 성이 가장 오래된 듯하며, 위만조선의 도성으로서 왕검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들은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강 이남지역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우리나라 성곽의 기원이 되는 고지성취락이 출현하고 있다. 즉 고지성취락인 양산패총 등에서 방어시설인 호(濠)나 목책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성읍국가의 표지적인 성곽형태인, 평야를 끼고 있는 구릉지대에 목책이나 토성이 축조되고 있다. 이러한 구릉지 토성은 삼한 제국의 통치거점이 되는데 서울의 몽촌토성, 대구의 달성, 경주의 반월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구릉지 목책이나 토성은 당시 무기의 발달정도에 비추어볼 때 원거리 가격무기인 화살 따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상징적인 기능도 했다. 그러나 무기체계의 발전과 더불어 영역국가인 삼국이 출현함에 따라 기존의 목책이나 토성은 방어력의 취약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전체면적의 70%가 산지로 되어 있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방어력이 높은 산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인 동시에 지방통치 거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즉 삼국의 지방행정 조직이 산성을 매개로 한 군관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성도 축조·정비되었는데 30년 걸려 완성된 고구려의 장안성이 그 대표적인 형태에 속한다. 장안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23㎞에 달하는 성곽으로서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안성의 성벽은 기초보강공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었는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 안팎에 호를 팠다. 그리고 외성 지역에 작은 돌로 포장된 도로시설이 확인되고 있어, 계획적인 도시계획에 의하여 축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밖에 장성도 축조되었는데,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신라가 발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성덕왕 때 축조한 장성, 그리고 왜의 침입에 대비한 관문성이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말과 조선시대에는 산성과는 달리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대체로 평지의 시가지를 둘러싼 읍성이 축조되었다. 읍성 안에 관청과 민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성곽은 기존 성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수원성의 축조로서 일단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곽은 축성재료에 따라 목책·토성·토석혼축성·석성·전축성으로 나뉜다. 그리고 지형에 따라 크게 고로봉·산봉·사모봉·마안봉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산지를 성벽이 둘러싼 모양에 따라 테뫼식·포곡식·복합식으로 나뉜다. 성곽의 시설로는 성문·수원·여장·배수시설·창고시설·암문·옹성·치성·각루(성벽의 모서리를 지키며 성안의 전투를 지휘하는 시설물)·해자(성벽 주변의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 등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축조시기는 대체로 2월과 7~9월이 많다. 이는 혹한과 무더위를 피하고 농번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농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축성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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