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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에서 20세기까지 서구 여러 나라에서 인도유럽어족과 핀란드어 및 헝가리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의 흐름.
고대 서양문학은 자료에 의해 확인할 길은 없으나, 고대 그리스어 작품과 라틴어 작품가운데는 탁월한 문학유산이 많다. 중세문학은 주로 토착어 작품들로 대표되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와 궁정연애시이다. 중세의 연극은 종교의식에서 시작되어, 점차 정교한 극으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문학은 과거 어느 때보다 발전했다. 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번성했다. 17세기에는 정치·사회의 계속된 분란이 문학에도 반영되었고, 내란과 정치적·종교적 갈등은 반(反)종교개혁의 성격을 드러냈다.
18세기 문학에서는 풍자와 논쟁, 산문 등이 발전했고, 한편으로는 심리소설과 감정을 다룬 시가 등장했다. 19세기에는 여러 문예사조, 즉 낭만주의·상징주의·사실주의 등이 현대문학의 흐름에 반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문학에서는 우수한 작품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위대한 작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고대 서양문학
고대 서양문학은 구전되어온 수많은 자료들이 기록되기 전에 잊혀졌거나, 기록된 것도 대부분 화재와 전쟁으로 소멸되거나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마멸되어 고고학자와 고문서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거나 복원된 것은 매우 적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 작품과 그보다 양이 훨씬 더 많은 라틴어 작품들 중에는 고대의 창조적인 상상력과 지성에 의해 형성된 탁월한 문학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바빌론·아시리아·이집트·그리스·로마의 5대 문명과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문화는 서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문화와 접촉했다. 가장 오래된 두 문명, 즉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점토 서판 조각이나 고대 이집트의 썩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문서는 현대에 이렇다 할 직접적인 문학적 의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빌론에서 최초의 법전과 신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2편의 서사시가 나왔는데, 그것은 먼 지역까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자연 세계에 대한 이집트인의 신비로운 직관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한편 히브리 문화는 서양문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구약성서〉 같은 초기의 저작물이 그곳에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성서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 시대 이래 라틴어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방언으로도 번역되어 서구인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전까지만 해도 유대교의 응축된 정신성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스 문학은 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의 종교적 신화에서 영향을 받긴 했으나 직접적인 문학의 모체가 없이 자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로마의 문인들은 주제나 주제를 다루는 방법, 운문과 운율을 선택할 때 고대 그리스에서 그 본보기를 찾았다(라틴 문학). 로마 문학은 결국 중세초까지 이어져 내려왔지만, 그리스 문학은 전적으로 라틴 전통 속에 포함되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재발견되었다.
그후 '고전적'인 전통은 특히 17세기의 일부 비평가들이 당대의 작가들은 주제와 문체에서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문학의 자연적인 발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서사시·비극·희극·서정시·풍자시·역사·전기·산문 등 문학의 모든 주요분야가 고대 그리스·로마 작가들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문학 장르). 그후에 발전한 분야는 대부분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어 서사시는 베르길리우스의 라틴 서사시의 본보기였고, 알카이오스와 사포의 서정시 형식은 카툴루스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리비우스와 타키투스의 역사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BC 5세기의 위대한 아테네 작가들이 남긴 비극과 비교할 때 로마의 세네카는 그들과 견줄 만한 작품을 쓰지 못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저술과 비교할 만한 사상도 고대 로마인은 내놓지 못했다.
현실적인 로마인들은 철학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은 추상적인 사고에 탁월했던 반면, 로마인들은 유달리 구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린 초상화가 보여주듯이 인간의 개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고대 작가들, 특히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은 서양인의 상상력과 도덕적 기질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은 서양인의 가치관을 형성했으며, 먼 후세까지 전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방인에 대한 예우에서부터 영웅들의 행동규범과 신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인간이 도덕적 자각에 이르는 모습을 숭고하게 표현했다. 로마 작가들 사이에서는 의무감을 강조하는 승화된 스토아 철학이 나이비우스·에니우스·카토에서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세네카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뿐만 아니라 로마의 유베날리스가 쓴 신랄한 풍자문과 아나크레온의 사랑과 술의 노래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상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상은 소포클레스의 합창곡에 잘 표현되어 있다. "경이로운 것이 많아도 흰 바다를 가로지르는 힘을 가진 인간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이상화는 수세기에 걸친 야만주의 시대로부터 문명이 출현한 후 그리스와 라틴 문학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고대가 막을 내리기 전에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이상으로 변형되었다. 그것을 그려낸 작가들은 중세문학의 전조가 되었다.
중세 서양문학
중세문학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각기 그 시작된 시기는 다르다.
그리스 문학은 300년경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수립된 때부터이고, 라틴 문학은 476년 로마가 몰락한 직후부터이며, 프랑스 문학은 800년경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가 촉진시킨 르네상스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렇듯 시작된 시기는 각각 달라도 중세문학이 끝난 시기는 15세기말로 거의 같다. 로마 제국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렸다는 것은 유럽이 초기교회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된 생활·문학·종교에 대한 조직적인 접근방식을 배우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그리스도교와 고전철학의 융합은 삶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중세적 습성의 기초를 이루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즉 그리스 세계의 항구적이고 한결같은 질서는 그리스도교적인 형태를 부여받았다. 자연은 신성한 것이며 정신적 진리의 상징적인 계시가 되었다. 고전문학도 이와 같은 상징주의를 부여받았다. 처음 성서에 썼던 주석과 해석의 방법이 이제는 고전이나 세속적인 작품에도 일반적인 원칙으로 확대·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언자였던 베르길리우스나, 인생을 통해 낙원(로마)에 이르는 영혼의 여로에 관한 설화인 〈아이네이스〉에서 발견되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접근방법은 〈신곡 The Divine Comedy〉에서 단테가 보여준 자신과 자신의 여정에 대한 비유적 인식과 동일한 전통에 속한다.
교회는 문학의 목표를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에 있는 성(聖) 베네딕투스 수도원은 529년에 세워졌고, 특히 6~7세기에 아일랜드 전도단이 라인 강 유역과 잉글랜드에 파견되었으며, 고트족 전도단이 도나우 강 유역으로 파견된 후 다른 수도원들도 계속 세워져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이 고트족·반달족·프랑크족·스칸디나비아인 등의 계속된 침략을 겪었음에도 이 수도원들은 서양의 유일한 고전문학을 보존할 수 있었다(라틴 문학). 그렇게 보존된 라틴어 고전과 계속 씌어진 각 지역의 라틴어 작품들은 중세 내내 토착어 작품들보다 훨씬 우세했다.
예컨대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 City of God〉, 영국 베네딕투스파 수도사 비드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연대기 Gesta Danorum〉 등은 중세의 철학·신학·역사·과학 분야의 대다수 주요작품처럼 모두 라틴어로 씌어졌다.
이 시기에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주로 토착어 작품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일상어). 유럽의 그리스도교 이전 문학은 구전되어 온 것으로 고대 북유럽의 신화, 시가집 〈시 에다 Poetic Edda〉, 아이슬란드의 전설과 영웅서사시(saga), 앵글로색슨어의 〈베오울프 Beowulf〉, 독일어의 〈힐데브란트의 노래 Song of Hildebrand〉에 반영되었다(구비문학, 독일문학). 이러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일어의 두운(頭韻) 문학전통에 속하지만, 그 내용 속에 서술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교 필사가에 의해 처음으로 기록됨으로써 원래 가지고 있던 이교도적 요소들이 그리스도교적 사상과 감정에 융합되었다.
아이슬란드 문학의 신화는 모든 독일문학에 되풀이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유럽의 공통된 원천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의 원본들만은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일관된 설명을 부여하고 있다. 각 나라의 수많은 발라드도 역시 암송으로 구전되던 초기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중세 토착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인 로맨스와 궁정연애시인데, 2가지 모두 대중적인 구비문학 전통의 요소와 학문적인 고급 문학의 요소를 결합하고 있으며, 대체로 프랑스에서 유래했다.
로맨스는 시구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또는 아서 왕 전설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롤랑의 노래 The Song of Roland〉와 같은 봉건사회의 영웅서사시를 기사들의 무용담으로 대치했다. 로맨스에서는 사랑·충성·인격이라는 복합적인 주제가 정신적 진리에 대한 추구와 결합되었는데, 그것은 당대 서양의 모든 주요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연애서정시도 역시 그 안에 이질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대중적인 연애시 전통의 영향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듯이 궁정연애시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프랑스 남부와 북부의 시인들이 쓴 이상적인 여인과 번민하는 구혼자 이야기가 전 유럽을 통해 모방되거나 재해석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탈리아 시칠리아파(派)의 시, 독일의 미네징거(연가), 라틴어 운문집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중세의 연극은 그리스도 출생 이후의 중요한 날에 교회에서 이루어진 종교의식에서 시작되었다(희곡). 종교의식의 극적 성격은 처음에는 몸짓과 무언극의 형식을 취하다가 나중에는 종교의식에 허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넣어 좀더 정교한 극적 형태로 발전했다.
이 과정이 더욱 진행되어 도시의 거리, 마을 빈터의 무대나 수레 위에서 연극이 공연되었다. 배우들은 장인조합원이거나 직업 배우로서 도시에 고용되어 지역축제나 종교축제에서 공연했다. 극은 신비극·기적극·도덕극의 3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그리스도의 행적을 자료로 한 것을 '신비극', 성인 순교자의 기적을 다룬 것을 '기적극'으로 구분하지만 영국에서는 양자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도덕극'은 영국에서 기적극보다 약간 늦은 15~16세기에 유행했는데, 의인화된 선과 악이 '인간', '만인' 등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주인공은 잠시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결국 선의 인도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원형적인 줄거리를 갖는 극이다.
중세극의 제목과 주제들은 종교적이지만, 각 작품의 소제목은 익살스럽거나 소극적(笑劇的)이고 때로는 외설적이기까지 한 내용을 위장한 것도 있다. 가장 유명한 도덕극 중 하나는 네덜란드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만인 Everyman〉이다.
중세문학은 대부분 작자 미상이고 쉽게 연도를 추정할 수 없다. 단테·초서·페트라르카·보카치오 같은 몇몇 위대한 시인과 작가들은 이 시대 말기에 출현했고, 그들의 작품은 최고의 중세문학이 지닌 과도기적 특성을 확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세사회를 탁월하게 해설했던 거장인 동시에 르네상스 문학의 위대한 주제와 형식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문학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르네상스' 혹은 '문예부흥'은 중세의 뒤를 이은 유럽의 역사적 시기를 말한다. 지적·예술적 탐구의 새로운 정신이 일깨워진 것이 이 시대의 정치적·종교적·철학적 현상을 지배한 특징으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정신의 부활이었다. 문학에서 르네상스는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분석을 의미했다. 학자들은 '잃어버린' 고대 문헌들을 찾아내어 번역했고 그것의 전파는 1450년경부터 발달한 유럽의 인쇄술에 의해 촉진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문학은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이루지 못한 수준에 도달했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고전학자들이 보여준 학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인데, 그들은 새로운 작가들에게 적합한 고전의 본보기를 제공해 주었다.
둘째, 마르틴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을 시발점으로 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모습인데, 프로테스탄트는 사람들의 눈길을 개인과 그들의 내적 경험으로 돌리게 했으며 가톨릭 국가들의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로 집약된 반응을 자극했다.
셋째,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절정에 달한 대탐험가들의 항해이다(→ 해외 탐험).
그것은 당대의 가장 재능 있는 작가들의 양심과 상상력을 환기시켰고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과학·천문학의 발달과 15세기말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 같은 그밖의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새로운 자유와 탐구정신은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 같은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선구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르네상스의 개화는 16세기 '플레야드파' 를 형성한 시인들의 시와 미셸 드 몽테뉴의 명상 수필에 나타났고, 이때 스페인은 이 나라 최고의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를 배출했다. 당대에 특출했던 또다른 인물은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루이스 데 카몽스이다. 한편 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번성했는데 대표적인 작가는 로페 데 베가와 힐 비센테이다. 영국에서도 극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르네상스의 학문과 영국의 전통이 융합되어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존 웹스터 등의 작품에 독특한 활력을 주었으며, 특히 영국 최고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셰익스피어는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군림했다.
16세기의 네덜란드 학자인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비판적 탐구정신, 고전학문에 대한 존중, 미신의 배척, 신의 가장 복잡미묘한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경의를 특징으로 하는 인문주의를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종교개혁이 문학에 미친 영향의 한 단면은 이 기간에 성서가 에라스무스의 초기 번역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토착어로 훌륭하게 번역되어 산문 서술의 새로운 기준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르네상스의 여세는 존 밀턴이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의 정신을 반영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17세기로 온전히 전승되었다.
17세기의 서양문학
17세기 서양에서는 정치·사회 면에 끊임없는 분란과 폭력이 자행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과학과 철학사상의 전파에 필수적인 수용적 환경을 조성했다. 존 던에서 존 드라이든에 이르는 이 시기의 진지한 작가들이 당면했던 큰 문제는 미셸 드 몽테뉴가 제기한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 라는 물음이었다. 이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경제학 및 자연과학의 권위를 비롯해 지식·신앙·이성의 근거와 상호관계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그러한 탐구적 태도는 프랑스에서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1637)과 파스칼의 〈팡세 Pensées〉(1657~58 집필), 영국에서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 Advancement of Learning〉(1605)와 홉스의 〈리바이어선 Leviathan〉(1651) 등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와 철학자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저술의 중요성은 회의주의적·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과학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신학 논쟁 및 이해와 인식이라는 일반적인 문제에까지 적용시킨 데 있다. 사상과 언어에 대한 이같은 근본적인 도전은 인간의 자화상에 심각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0세기의 대표적인 시인 T.S. 엘리엇이 '감수성의 단절'이라고 한 것에 반영되었다. 엘리엇은 감수성의 단절이 청교도 혁명(1642~51) 이후 영국에 뿌리를 박았으며 이로써 '어떤 경험이건 탐식'할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후대의 영국 시인들은 사고하면서 느끼는 통일된 감수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17세기 초기와 중기에 일어난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엄청난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7세기의 영국 문학사는 1642년 극장폐쇄를 몰고온 청교도혁명(1642~49)과 1660년 왕정복고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의해 양분된다. 프랑스 문학사 역시 자기들끼리 피 흘린 프롱드 당의 내란(1648~53)에 의해 양분되었으며, 희극작가 몰리에르·라신·부알로 및 라 퐁텐이 활동한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가 뒤를 이었다.
독일에서의 17세기 전반기는 30년전쟁(1618~48)의 종교적·정치적 싸움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후에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궁이 누린 중앙집권 체제와 영화에 뒤지지 않으려는 독일 군주들의 온갖 시도로 얼룩졌다. 네덜란드도 17세기 전반에는 스페인에 대항한 독립투쟁인 80년전쟁(1568~1648)에 휘말렸는데, 전쟁의 승리로 독립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헨리크 슈피겔, 다니엘 하인시우스·헤르브란트 브레데로가 활동한 네덜란드 시의 '황금기'를 맞았다.
17세기 전반을 지배한 내란과 정치적·종교적 갈등은 여러 모로 반(反)종교개혁의 성격을 드러냈고, 종교분쟁의 양상은 문학작품의 양식과 관심사에 반영되었다.
이에 대한 반동의 하나로 특히 이탈리아·독일·스페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미술과 문학에 이른바 바로크 양식이 유행했다. 이 양식은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마리노, 스페인의 루이스 데 공고라, 독일의 마르틴 오피츠 등의 작품에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바로크 문학은 오랫동안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퇴폐적이라고 여겨져왔으나 오늘날에는 좀더 호의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교성·미사여구·우화·수사 및 대담한 꾸밈새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양식을 뜻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바로크 문학이 이 기간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특산물이었다면 17세기 전반기 영국 시의 주종을 이룬 것은 '형이상파' 시였다(형이상파 시인). 드라이든이 존 던의 시에 처음으로 적용한 이 용어는 연애시를 논하면서 "존 던이 형이상학을 너무 즐겨 쓴다"고 한 데서 유래했고, 새뮤얼 존슨 박사에 의해서 그 뜻이 확대되었다.
18세기의 시인·사전편집자·비평가인 존슨은 〈영국 시인들의 생애 Lives of Poets〉의 〈카울리 론〉에서 형이상파 시인의 특징은 학식의 지나친 과시라고 지적하고, 그들의 위트는 '조화로운 부조화', 즉 동떨어진 이미지의 조화라고 했다. 지금은 각각의 문체가 완연히 다르더라도 바로크 문학과 일정한 유사성이 있고, 복합적인 비유적 묘사와 기발한 착상 같은 시적 특성이 보이면 형이상파 시인의 범주에 넣는다.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존 던 외에도 앤드루 마블, 종교시인 조지 허버트, 리처드 그래쇼, 헨리 본 등이 있다.
17세기 문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논쟁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을 모방해 계속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과학·철학의 새로운 사상가들과 문학의 새로운 실험가들이 지닌 열망과 충돌하면서 빚어진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문학의 주제와 문체를 그리스·라틴의 고전에서 본떠야 한다는 고전파와 프랑스 고유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근대파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스페인에서는 미사여구·라틴어체·고전 등을 선호하는 파와 좀더 간결하고 심오한 경구조의 문체를 옹호하는 파 사이에 이와 유사한 갈등이 있었다(콘셉티스모). 이러한 갈등은 과학과 탐험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산문체를 예고했다. 그결과 프랑스의 근대파는 대체로 데카르트의 추종자가 되었고, 영국에서는 왕립학회가 밀턴과 드라이든의 위대한 산문체를 본받아 논리 전개에 적당한 단순하고 현실적인 화법을 권장한 사실에서 이와 비슷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의 서양문학
18세기를 '이성의 시대'라고 단정짓는 것은 이 시대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긴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도 이성이 우위를 차지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차라리 '이성과 정열의 시대'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성의 존중은 질서, 균형, 예의범절, 과학적 지식의 추구로 나타났고, 정서의 개발은 박애정신·인간관계·신앙심·감정·감수성에 대한 존중을 자극했다. 문학에서 합리주의 정신은 풍자, 논쟁, 위트, 평이한 산문을 촉진시켰고, 감성 존중은 심리소설과 숭고한 감정을 다룬 시의 창작을 고취시켰다.
영국에서는 위트와 풍자 및 논쟁조가 알렉산더 포프, 조너선 스위프트, 새뮤얼 존슨의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17세기 드라이든의 전통을 답습한 것이다. 이 시기의 영문학에서는 소설이 주요한 문학양식이 되었다. 이는 헨리 필딩, 다니엘 디포, 토비어스 스몰릿의 작품에서 드러난 합리적 사실주의와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과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섄디 Tristram Shandy〉에 나타난 심리적인 면밀성 덕분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계몽운동의 철학적·정치적 저술이 주류를 이루면서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혁명을 예견했다.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샤를 드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장 달랑베르 등은 모두 당국과 직접적인 마찰을 일으키면서 대부분의 저술을 사회적·종교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바쳤다. 18세기 초반의 독일문학은 극작가·비평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 의해 나름대로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의 조류를 따랐다. 독일문학의 위대한 시기는 세기말에 왔으며, 이 시기에 지고한 감정의 교화는 이른바 질풍노도운동에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질풍노도운동과 관련된, 독일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이다. 두 사람은 극과 시에서 질풍노도운동이 일으킨 격랑을 훨씬 뛰어넘었다.
19세기의 서양문학
개요
19세기는 서양문학사상 가장 중요하고 흥미 있는 시기인데, 현대의 많은 문예사조와 문학적 조건이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
이를테면 19세기에 형성되어 발전된 낭만주의·상징주의·사실주의가 현대문학의 흐름에 반영되어 있으며, 20세기의 많은 사회적·경제적 특성이 19세기에 형성되었다.
낭만주의
19세기 초반을 지배한 문학운동은 낭만주의이다.
그것은 독일의 '질풍노도'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1798) 출판으로 낭만주의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또한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19세기초의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요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낭만주의 문학의 여러 가지 특징은 문학적 또는 철학적 원천에서 유래한다.
철학적 배경은 18세기에 장 자크 루소가 제공했는데, 그가 개인과 영감의 힘을 강조한 것은 워즈워스를 비롯해 독일의 프리드리히 횔덜린, 루트비히 티크, 프랑스의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에게 영향을 주었다. 생 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Paul et Virginie〉(1787)는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지나친 감상주의를 예고한 것이었다. 루소의 영향은 긍정적이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지성을 강조한 18세기 합리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기도 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낭만주의의 제1신조는 자기인식에 대한 믿음이었다.
18세기말 프랑스의 작가 파브르 돌리베등은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영감'과 비슷한 '생명의 숨결'이라는 개념으로 물질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과 원시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살펴볼 때에만 사물의 진리가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영감을 강조함으로써, 시인이 선지자이자 몽상가로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고전을 모방하려는 형식상의 인습은 구속으로 여겨져 거부되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와 보통 사람의 언어가 강조되었으며, 그래서 워즈워스는 단순화된 새로운 어법을 만들어 쓰려는 시도까지 했다.
시는 18세기 사회의 맥락으로부터 이탈했고, 시인은 궁극적인 진리와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졌다. 낭만주의 시인의 2가지 고전적 유형은 존 키츠의 신비적인 몽상가와 바이런 경의 초인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자들을 표본으로 삼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후세 소설가에 이르러서는 바이런 식의 영웅에 대한 풍자가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인이었다는 사실은 낭만주의 사조가 유럽 전체를 관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발칸 제국에서 낭만주의는 희곡의 형태를 취했으나,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위대한 희곡작품을 내지 못했다. 19세기초와 중기에는 희곡보다 시와 산문이 활발했다.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었던 낭만주의 경향의 시는 스페인의 호세 데 에스프론세다, 낭만주의가 민족주의적 감정과 부합되었던 이탈리아의 우고 포스콜로와 자코모 레오파르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미하일 레르몬토프, 폴란드의 아담 미츠키에비치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 민족주의적 감정의 출현과 제휴한 낭만주의의 흐름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모험소설, 에드거 앨런 포의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요소, 월트 휘트먼과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 워즈워스의 선언처럼 일반적 논리와 경험을 초월한 '통찰'의 힘을 확언한 랠프 월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초월주의 이론 등에서 엿볼 수 있다.
낭만주의 시의 추진력은 1830년경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라든가 불행한 연인 같은 주제와 기법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기는 했으나 좀더 객관적인 문체에 자리를 양보했다.
후기 낭만주의
최초의 후기 낭만주의 시인은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의 독일 시는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 할러뮌데와 오스트리아 시인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에서 새로운 경향이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워즈워스를 따랐다. 주요발전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고답파 시 운동의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테오필 고티에가 시작한 고답파 운동은 어떤 점에서는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그것에서 돋아난 가지였다. 시의 순수한 형식 요소와 심미학 및 '예술을 위한 예술'에 중점을 둠으로써 고답파는 프랑스 시의 방향을 바꾸었고 다른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운동의 가장 대표적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는 "예술품이 아닌 것은 모두가 추하고 쓸모 없다"고 믿었다. 낭만주의에서 새롭게 발전한 또하나의 가지는 회화·조각·음악 운동에서 '빌려온'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성장이었다. 인상주의의 제1인자인 폴 베를렌은 색채나 형태의 배합을 이루기 위해 암시, 분위기, 순간순간 바뀌는 운율을 사용했다. 미묘한 느낌과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언어와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사용한 상징주의는 스테판 말라르메, 아르튀르 랭보의 시에 나타난다.
19세기 중기와 후기에 프랑스 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시인 각자가 개성적인 어휘를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했다.
영국에서는 교육기회의 확산과 이동문고의 보급으로 소설의 수요가 급증했다. 19세기초에 제인 오스틴은 이미 〈노생거 사원 Northanger Abbey〉(1818)에서, 18세기 후반에 유행하여 낭만주의를 선도한 중세를 배경으로 한 괴기소설인 고딕 소설의 과잉을 풍자했으며, 〈분별과 다감 Sense and Sensibility〉(1811)에서 이성과 낭만적 감성 사이의 갈등을 풍자했다.
프랑스에서 지성과 감성의 갈등은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 Adolphe〉(1816), 스탕달의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1857) 등의 작품에 나타났다. 플로베르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작품이 보여주는 세밀한 언어구사와 사실주의는 프랑스의 기 드 모파상과 이탈리아의 조반니 베르가에 의해 더욱 진전되었고, 에밀 졸라의 극단적인 자연주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졸라는 〈테레즈 라캥 Thérèse Raquin〉(1867)을 비롯한 그의 소설 문장을 '문학적 외과 해부'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사실주의와 민족주의는 당대의 대가들, 이를테면 영국의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러시아의 니콜라이 고골리,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안톤 체호프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다. 그들의 작품에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싹튼 자유주의·인본주의·사회주의의 인식력에 자극받은 사회적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낭만주의 희곡이 멜로드라마로 전락한 것은 유럽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당대의 사회문제를 취급하는 데는 희곡이 소설보다 뒤졌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에 의해 극이 부흥되면서 개인과 사회, 관념론자와 현실주의자 사이의 낭만적 갈등이 다시 등장했다.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극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근대극의 효시는 고골리의 〈검찰관 Government Inspector〉(1836)이지만, 근대극의 중요성은 투르게네프의 〈시골에서의 한 달 Month in the Country〉(1850)과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에 와서야 비로소 인식되었다.
20세기의 서양문학
20세기에 접어들자 유럽과 미국을 지배한 사회적·문화적 상황은 19세기 중기·말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20세기에는 영어로 작품을 쓴 조지프 콘래드, 토머스 하디, 헨리 제임스, D.H. 로렌스 등의 작품에서 그러한 상황의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19세기말의 비교적 안정된 세계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문학에서 이러한 새로운 의식의 각성은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첫권 〈스완네 집쪽으로 Du côté du chez Swann〉(1913), 앙드레 지드의 〈교황청의 지하도 Les Caves du Vatican〉(1914),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1922),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Der Prozeβ〉(1925, 사후출판), 토마스 만의 〈마의 산 Der Zauberberg〉(1924) 같은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작가에 의해 1920년대 이후의 많은 작품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영향이 조성되었다. 무의식 세계와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 그들과 당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반영되었다(심리소설). 이 영향의 2가지 중요한 원천은 지드와 토마스 만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1920년대에 심리분석에 관한 저술로 서구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크문트 프로이트이다.
19세기의 개념과 양식으로부터의 이탈은 소설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Manifeste du surréalisme〉(1924)은 자발성과 전통에서 완전한 결별을 고하는 최초의 공식 선언이었다. 초현실주의는 꿈과 자동기술 및 그밖의 비논리적 방법을 강조한 점에서 프로이트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초현실주의는 정식 예술운동으로는 단명했지만 20세기의 예술과 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 시대의 불확실성과 그것을 다루고, 그것에 어떤 예술적 논리성을 부여하려고 한 다양한 기도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Duino Elegies〉(1922)·〈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Sonnets an Orpheus〉(1923), T.S. 엘리엇의 〈황무지 The Waste Land〉(1922), 정체성의 불안정을 다룬 루이지 피란델로의 극 〈헨리 4세 Henry Ⅳ〉(1922)에서도 볼 수 있다.
1910, 1920년대의 서양문학의 국제적·실험적 기간은 위대한 작품들을 산출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모형을 제시했다는 점 때문에도 중요하다.
이 시기의 주요작품에 분명히 나타난 것은 점점 더해가는 긴박한 위기의식, 개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확신한 19세기적 믿음에 대한 불신, 인간의 문제를 다룬 모든 철학적·종교적 해답에 대한 깊은 회의이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20세기 사상의 이러한 특성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맥락으로 확대되어, 작가들은 작품에 자신의 정치사상을 담는 참여파와 예술이 정치에 지배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보수파로 나누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도 정치참여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1930년대의 주요작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것과 유사한 논쟁이 20세기말에 와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위대한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사회적·기술적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그 압력이 누적되어 일어난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창작과 독서가 자취를 감춘다 하더라도 그리 놀라운 현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비평가들이 볼 때 미국과 같이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몇몇 나라에서는 인쇄된 활자 자체가 그 중심위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일반대중의 정신 속에서 인쇄물은 청중의 적극적인 지적 참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청각 전자문화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전달매체는 국제적으로 유사한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으나 그것의 문학적 가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현대작가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서는 작가를 평가하기가 어렵다든가, 과격한 실험이 문학의 여러 분야를 특징짓고 있다든가, 전통적인 창작형태들이 각기 그 특성을 잃고 서로 용해되는 경향이 생겼다는 점 등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설이 시의 여러 가지 면모를 띠거나 일종의 차원 높은 비소설 기록문학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또한 인쇄매체에 대한 실험은 시를 낱말이 있는 그림처럼 보이게 했고, 극작품은 전통적인 구성과 유사한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용의주도하게 배열한 일련의 몸짓이나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실험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문학이 주로 실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학이 20세기초에 획득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다른 특징들을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식견 있는 비평가들은 비록 획기적인 대작이 없고 문체와 주제의 다양성이란 면에서 이 시대의 작품들이 대체로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긴 하지만 지금도 우수한 문학작품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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