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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다른 표기 언어 四天王寺址 동의어 사적 제8호

요약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인 사천왕사의 터.

사적 제8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사천왕사는 쌍탑식(雙塔式) 가람이며, 창건과 관련된 많은 설화를 통해 당시 신라인들의 우주관과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사지(寺址)는 원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이곳을 지목했는데, 여왕이 죽은 지 30년 뒤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다시 여왕의 예지력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낭산을 수미산처럼 여긴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을 관장하는 천왕의 주처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다는 불교적 우주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674년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하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군을 막을 계책을 구했다. 이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침략이 임박하여 절을 완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우선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든 후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는 모두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고 이름하고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에 탑을 세운 쌍탑식가람이며, 금당 북쪽으로는 좌우에 경루를 두었다. 두 탑지(塔址)에는 사방 3칸의 초석이 남아 있고, 그 남쪽에는 중문지(中門址), 경루 북쪽으로는 강당지가 있으며 둘레를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무늬 와당(瓦當)과 사천왕이 새겨진 전(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은 사지 동편에 있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 비신, 당간지주뿐이다.

사천왕사지출토녹유사천왕상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사천왕상이 부조된 전(塼). 일제시대에 양 탑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파편들을 일부 복원한 것이며, 정확한 출토지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복원한 상들은 모두 2마리의 악귀를 깔고 앉아 있으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이 가운데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장도를 든 상과 투구를 갖추고 양 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는 상이다.

두 상은 지물에 의해 각각 동방 지국천과 남방 증장천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부조상의 제작자와 그 명칭에 대해 선덕여왕대(632~646)에 활약한 승려 조각가 양지가 만든 팔부중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의장은 어느 정도 장식화되어 있으나 신체의 양감표현이나 악귀의 묘사솜씨는 매우 뛰어난 사실적 감각을 보여준다.

갑옷과 장신구도 화려하고 세부까지 정교하게 꾸며져 있어 당시 조각가의 원숙한 기량이 엿보인다. 파편 가운데 녹유나 갈유와 같은 연유계 유약으로 시유된 것이 있어서 7세기의 유약기술 발달 정도를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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