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사이드 이븐 술탄

다른 표기 언어 Sa'id ibn Sultan
요약 테이블
출생 1791, 오만
사망 1856. 10. 19, 해상
국적 잔지바르

요약 무스카트 오만(오만의 옛 이름), 잔지바르의 통치자(1806~56).
정식 이름은 Sa⁽īd ibn Sulṭān ibn Aḥmad ibn Sa⁽īd al-Būsa ⁽īdī. Sa⁽īd Imām, Sa⁽īd Sayyid라고도 함.

개요

잔지바르를 동아프리카에서 으뜸가는 강국이자 서인도양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초기생애

사이드는 1791년에 태어나 1804년에 동생 살림과 공동으로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사촌인 바드르에게 곧 빼앗겼다.

1806년 사이드는 바드르를 암살한 후 실질적으로 유일한 왕이 되었으며 실권이 없는 동생 살림은 1821년 죽을 때까지 이름뿐인 지위에 있었다. 유럽인들은 종종 사이드를 이맘(이슬람의 종교지도자)이나 술탄(이슬람 군주)이라고 불렀으나 스스로는 사이이드(마호메트의 후예)라고 칭했다. 그는 이전의 모든 왕들이 차지했던 이맘이라는 순전히 종교적인 직책에 선출된 적이 결코 없었다. 초창기에 그는 가족·종족 간의 싸움, 인도양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다툼, 아랍에서 와하비파 이슬람 정화운동의 확산, 카와심 해적들의 끊임없는 약탈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소규모의 군대와 상업적인 목적에도 쓸 수 있는 함대를 만들었다. 또한 1824년에 마카(메카) 순례를 함으로써 자신이 나라 안팎의 적을 완전히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비울 수도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세력 확대

당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은 오만에 충성하는 여러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만은 1698년에 이 지역에서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드가 즉위할 당시에는 마자르 일족이 몸바사에 사실상의 독립된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오만은 약화되었고 여러나라들의 충성심은 허울에 불과했다. 1822년에 사이드는 원정대를 파견하여 마자르 일족을 펨바 섬에서 몰아냈다. 영국 정부는 그같은 처사를 용납하지 않고 해군을 파견해 1824~26년에 몸바사를 몇 차례 점거했다.

1827년에 사이드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몸소 갔지만 효과를 본 것은 조세수입을 크게 늘린 것뿐이었다. 이어 몸바사를 둘러싸고 사이드와 마자르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1837년 계략을 쓴 사이드가 약 30명의 적군 포로를 잡고서 전투는 끝났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추방되었으나 일부는 살해되었다. 사이드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택했을지라도 맘루크(노예용병) 못지않게 잔인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사이드는 1828년 처음으로 잔지바르를 방문했다.

그는 곧 정향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두 지역을 얻었다. 그는 잔지바르와 펨바 섬들을 세계에서 가장 큰 정향나무 생산지역으로 만들려고 그곳에 거주했다. 1834년에 수도를 무스카트에서 잔지바르로 옮기려 했으며 1840년대까지 두 지역에서 대체로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동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히 조세수입 증대에만 있지 않았고 오히려 상업적인 데 있었다. 1820년대부터 잔지바르의 대상(隊商)들은 아프리카의 생산품들을 아프리카의 대상들이 해안으로 운반하던 종래의 무역 관행을 바꾸어놓았다.

늦어도 1839년까지 사이드의 대상을 포함한 잔지바르의 대상들은 상아·노예 등의 상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섰고, 탕가니카 호(湖) 너머 지금의 우간다에 이르는 완전히 새로운 무역망이 생겨났다. 잔지바르에 미국(1837)·영국(1841)·프랑스(1844) 등 외국 영사관이 설립되자 관례상 왕궁 이전 및 그밖의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을 비롯한 이들 나라는 주요고객들이 되었으나 사이드는 상품을 자신의 배에 실어 아라비아와 인도, 때로는 유럽과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1840년대에 이르러 그는 잔지바르를 동아프리카의 으뜸가는 강국이자 서인도양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겸손만은 아니었으며, 실제로 무역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재위기간 내내 그는 노예무역을 폐지하라는 영국의 압력을 받았다. 그는 영국 해군사령관에게 "이슬람교도들과의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기 때문에 어떤 강력한 힘이 도와주지 않는 한 그 짐을 질 수 없다"고 말했다.

1822년에 영국과 체결한 협약에 따라 그는 그의 국민들이 그리스도교 국가의 사람들에게 노예를 팔지 못하게 했다. 1842년까지 연평균 1만 5,000여 명의 노예를 수입했는데, 그중 일부는 정향나무 농장개발을 위해 동원되었음이 분명하다. 1845년 그는 그의 아프리카 영토에서 노예수출입을 금지하는 보다 진전된 조약을 영국과 체결했다. 당시 그의 나라에 있는 노예는 1,000명이 넘었다. 죽을 때 그는 노예들을 풀어주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자신의 농장노예들은 제외했다.

사이드 이븐 술탄

사이드의 상업제국은 행정체계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주관적·가부장적으로 통치했으며, 사건과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대중 앞에 직접 나와 앉았다. 상업상의 모험은 인도의 상인들에게 주로 의지했으며 그들이 이주해 들어오는 것을 적극 장려했다.

해군장교들은 사이드를 대표해 무역에도 관여했다. 사이드는,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이슬람의 이바디파에 속했다. 국민들의 대다수는 수니파였으며 그들을 위해 특별 재판관을 임명했다. 그의 딸 살라마가 쓴 〈아라비아 공주의 회상록 Memoirs of an Arabian Princess〉(1886)에는 사이드의 사생활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들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으나 주로 체르케스인 또는 에티오피아인인 첩 70여 명을 거느렸으며, 그 사이에 25명의 아들과 다수의 딸을 두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던 그는 정성들여 만든 가족모임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애정 깊은 아버지였다. 많은 노예들과 가부장적 관계를 가졌으며 때때로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빈틈 없는 기수이자 노련한 뱃사람이었던 그는 1856년 항해중에 죽었고,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했다. 유언에 따라 영토 잔지바르와 무스카트 오만은 아들 마지드와 투와인에게 각각 분할 상속되었다. 영국 영사는 "사이드는 모든 사람의 가장 진실한 친구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라고 썼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왕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사이드 이븐 술탄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