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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의 군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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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는 외사촌 동생인 앨버트 공의 잘생긴 외모에 매혹되어, 그가 영국 왕실을 방문하러 윈저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에 그에게 청혼했다.

그들은 이듬해 2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정치적 당파심을 과시하는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결혼식에 거의 초대받지 못한 토리당원들은 앨버트에게 여왕 다음가는 지위와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빅토리아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여왕이 앨버트와 결혼함으로써 멜버른과 휘그당에 대한 여왕의 애착이 반감되었다. 앨버트는 여왕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렸고, 그는 여왕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여왕은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의지했고 또 그에게서 왕실 통치의 요체와 궁중 생활의 미덕을 배웠다. 곧이어 자녀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빅토리아는 1840년에 제1왕녀(비키)를 낳았는데, 비키는 1858년에 프로이센 왕세자와 결혼하여 훗날의 독일제국 황제인 빌헬름 2세의 모후가 되었다. 영국 왕세자(나중에 에드워드 7세)는 1841년에 태어났다. 1843년에는 헤센 대공비가 된 앨리스 공주가 태어났고, 1844년에는 뒤에 에든버러 공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 앨프레드 왕자가 태어났으며, 1846년에는 헬레나 공주(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제후인 크리스티안의 아내), 1848년에는 루이즈 공주(아가일 공작부인), 1850년에는 아서 왕자(코노트 공작), 1853년에는 레오폴드 왕자(올버니 공작), 그리고 1857년에는 비트리스 공주(바텐베르크의 제후인 하인리히의 아내)가 태어났다.

여왕의 첫 손자는 1859년에 태어났고, 첫 증손자는 1879년에 태어났다. 여왕이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증손자는 37명이나 되었다.

결혼초에 여왕은 남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멜버른의 거듭된 제안에 따라 앨버트 공은 공문서를 보아도 좋다는 특별 허가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왕이 각료들을 만나는 자리에 배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여왕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앨버트 공이 '비밀 상자를 여는 열쇠'를 받았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 거듭되고 빅토리아가 남편에 대해 차츰 더 의존하게 되자 앨버트의 정치적 역할도 점점 커졌다. 군주라는 칭호는 빅토리아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군주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은 앨버트였다. 앨버트는 어느 점으로 보나 진정한 영국 왕이었다.

멜버른 내각이 1841년 총선에서 패배한 뒤 여왕과 필의 첫번째 면담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멜버른이 후임 총리에게 여왕을 다루는 법을 충고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멜버른은 여왕이 결코 잘난 체하는 사람이 아니고, 모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그런 일들을 쉽게(간단 명료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충고했다. 여왕은 자신의 견해를 재검토하고 자신의 판단을 재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42년 여름에 여왕 암살 음모가 일어났을 때 필이 진심으로 슬퍼하자, 여왕이 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차갑고 괴팍한 사람'이라는 평가에서 '당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위대한 정치가'로 바뀌었다.

이렇게 여왕의 인식이 달라진 데는 앨버트 공과 필의 친밀한 관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무장관 애버딘 경도 여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842년에 독점욕이 강한 레첸이 독일로 떠난 것은 빅토리아의 총애를 둘러싼 궁중 내 권력 투쟁에서 앨버트가 레첸에게 승리했다는 증거였다. 앨버트는 여왕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한 각료'가 되었다. 앨버트는 부지런히 일했고, 각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했으며, 여왕의 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하여 여왕의 수입을 늘렸다.

앨버트 공의 권세와 영향력은 아일오브와이트 섬에 오즈번 왕궁을 짓고, 스코틀랜드에 발모럴 성을 지은 것으로 드러났다.

앨버트는 화려한 파티를 좋아하는 빅토리아에게 런던을 싫어하도록 가르쳤다.

빅토리아는 오즈번 궁에 자주 갔지만, 여왕이 가장 행복해 한 것은 발모럴 성에서 지낼 때였다. 여왕 가족은 이곳에서 소박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여왕은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을 좋아하고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

여왕 부부가 스코틀랜드나 아일오브와이트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 것은 영국 군주제가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었다는 증거였다.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오붓한 사생활을 추구하여, 중산층 국민과 비슷한 생활 방식을 채택했다. 앨버트는 지적 문제와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빅토리아의 취미는 대다수 영국 국민의 취미에 더 가까웠다. 빅토리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겼고, 서커스와 밀랍 전시회를 후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빅토리아가 고상한 체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또한 안식일 엄수주의자도 아니었다.

여왕은 발모럴 성에서 가난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지만, 그래도 사회를 보는 안목은 별로 높아지지 않았다. 1846년에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곡물법(영국 곡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는 보호 무역법) 폐지를 지지했지만, 그들 부부는 여전히 아일랜드의 비극보다 오즈번 왕궁 건설과 대외정책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빅토리아는 정부의 차티스트(광범위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탄압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영국 노동자들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여왕에게 충성한다고 믿었다.

1848년에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가 실패로 끝나자, 여왕은 대다수 국민의 충성심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유럽 대륙에서 혁명이 잇따르자, 빅토리아는 혁명이 나라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간에,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빅토리아 통치의 절정기는 '만국박람회'가 열린 1851년이었다. 앨버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이 될 국제 무역박람회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했다. 만국박람회를 위해 하이드 공원에 세워진 수정궁은 온실에서 착상을 얻은 유리 건물로서, 건축학의 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건물에서 열린 박람회는 영국의 부와 과학 기술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빅토리아가 생각하기에 박람회의 성공은 남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증거였다. 이 박람회에서 얻은 수익금은 사우스켄싱턴 복합 단지를 건립하는 데 쓰였다.

앨버트는 정당을 초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빅토리아에게 가르쳤다. 그는 입헌군주제에는 섬세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빅토리아보다 더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앨버트 자신은 보수당에 공감하고 있었다.

한 예로, 곡물법 토론이 벌어진 첫날, 필이 연설하고 있을 때 하원에 나타나 그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여왕과 마찬가지로 앨버트도 영국 정치에서 군주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군주의 적극적인 역할은 당시의 유동적인 정치 상황 때문에도 더욱 필요해보였다. 곡물법이 폐지된(1846) 뒤, 어느 한 정파가 하원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군소 파벌의 일시적인 제휴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 1868년 총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는 각료가 아닌 평의원의 황금기였고, 이런 상황에서는 군주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정치 개입이 필요하기까지 했다. 군주는 내각 구성자의 역할을 맡았고, 특히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는 중재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보조적' 위치에 있었다. 영국 군주는 외교 문제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전통이 있었고, 외무장관과 단둘이 외교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유럽 전역에 친인척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주 외국 군주를 방문하거나 외국 군주의 방문을 받았다. 앨버트는 이같은 왕실의 개인적인 관계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결과 외무장관인 파머스턴 경과 충돌이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50년에 파머스턴 장관에게 여왕의 결정을 마음대로 바꾸지 말라고 말한 뒤에도, 그는 앨버트와 빅토리아가 찬성하지 않는 정책,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민족주의운동을 조장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1851년에는 여왕과 상의하지 않고 루이 나폴레옹(나중에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승인하자, 총리인 존 러셀 경은 마침내 그를 해임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국민에게 인기가 높은 파머스턴은 내무장관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앨버트가 죽은 뒤에는 파머스턴에 대한 빅토리아의 불만도 줄어들었는데, 그의 보수적인 국내 정책과 영국이 국제 문제에서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빅토리아의 견해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크림 전쟁(1854~56)이 일어나기 직전에 여왕 부부는 국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앨버트는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러시아를 지지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될수록 여왕에 대한 충성심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빅토리아는 부상병을 돕는 여성위원회를 직접 감독했고, 플로런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후원했다. 병원으로 부상병을 찾아가기도 했고,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제정하여 용감한 병사에게 수여했다.

1861년 12월 4일에 앨버트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앨버트를 통한 군주정치도 종말을 맞았다.

그의 영향력 아래서 여왕은 개인적 습관과 정치적 성향을 바꿨는데, 이런 변화는 영국 군주제의 탈바꿈으로 이어졌다. 역사가인 G.M. 영이 말했듯이, 영국 군주는 명확하지만 불안정한 영향력 대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인 영향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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