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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가 죽은 뒤, 빅토리아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여왕은 군주가 해야 할 의례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해마다 4개월 동안을 발모럴 성과 오즈번 궁에서 지냈다. 이것이 각료들에게 주는 불편과 부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중도 처음에는 여왕의 슬픔을 동정했지만, 자리를 비우는 군주에 대한 참을성을 점점 잃었다. 그러나 아무도 고집센 여왕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여왕은 의례적 의무를 거부했지만 앨버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효율적인 정치적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왕이 받은 훈련과 앨버트가 그녀에게 끼친 영향력은 1867년에 선거법이 개정된 뒤 더 나은 정당 조직과 더 광범위한 유권자가 초래한 '진자의 진동처럼 세력교체가 빈번한' 정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왕은 남편의 죽음을 왕세자 탓으로 돌리고(앨버트 공은 아일랜드에서 무분별한 행위를 저지른 젊은 왕세자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왔음) 외로움에서 오는 불만을 왕세자에게 거리낌 없이 터뜨리면서 그에게 어떤 책임 있는 일도 맡기려하려 하지 않았다(에드워드 7세). 이 모자 사이의 불화는 끝내 해소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여왕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왕세자 부부의 인기를 시샘했다.
빅토리아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에게 굴복하여,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대립 관계에서 한쪽 편을 들게 되었다.
앨버트 공은 디즈레일리를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1846년에 곡물법을 폐지할 때 디즈레일리가 로버트 필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을 끝내 잊지 않았다. 앨버트 공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경쟁자인 글래드스턴을 좋아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여왕의 기분을 달래주고 여왕의 자신감을 되찾아줄 수 있었으며, 외로운 여왕의 부담을 가볍게 덜어주었다.
게다가 디즈레일리는 "폐하께서 되도록 쉽게 일을 처리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저의 기쁨이며 의무"라고 말했는데, 여왕은 자신이 과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접근 방식은 특히 성공적이었다. 반면에 글래드스턴은 여왕이 "죽도록 지쳐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턴 자신이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쉽게 지쳤다. 여왕은 정치와 외교 문제에 대한 글래드스턴의 도덕적(여왕은 이것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음) 접근 방식을 참지 못했다. 글래드스턴은 여왕을 설득하여 군주의 의례적 의무를 다시 시작하게 하려고 애썼는데, 그 끈질기고 재치 없는 설득은 특히 여왕을 화나게 했다. 아일랜드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의 관계는 훨씬 더 멀어졌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의 평화'를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지만, 여왕은 대다수 국민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여왕은 혼란을 싫어했고, 아일랜드 자치를 제안하는 사람은 분명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왕은 1874년 선거에서 글래드스턴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거가 중요한 전기를 이룩했다고 기뻐했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의 공통점은 동방과 제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낭만적인 애착이었다.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선거법 개정(1867)을 지지했지만, 그의 사회 개혁안에는 거의 흥미가 없었고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와 독단적인 대외 정책은 여왕을 매혹시켰다.
디즈레일리가 1875년에 뛰어난 책략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거의 절반 가까이 사들이자(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완전 지배하지 못하게 막은 조치), 여왕은 갈채를 보냈다. 1876년 여왕의 칭호에 '인도 여제'라는 칭호가 덧붙자 여왕은 더욱 감격했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는 골치 아픈 '동방 문제'(기울어져가는 투르크 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투르크를 지지하는 것이 영국에 가장 이롭다는 입장을 취했는데, 투르크가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들에게 극악무도한 잔악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된 뒤에도 여왕과 그의 총리는 이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가 전쟁을 시작하자, 디즈레일리는 호전적인 여왕을 달래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여왕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라고 요구했다. 1878년의 베를린 회의에서 디즈레일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영국은 전략 요충인 키프로스 섬을 얻었다. 여왕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1879년 9월에 의회 해산이 임박하자 여왕은 자유당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이 집권할 것을 두려워했다.
여왕이 걱정한 대로 1880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고, 여왕은 글래드스턴을 다시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과격파가 지배하는 글래드스턴 내각(여왕은 그렇게 믿었음)이 나라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여왕의 중재 역할 덕분에 상원과 하원은 타협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1884년의 제3차 선거법개정이 결실을 맺었다.
이제 군주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더이상 내각 구성자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은 전보다 제한된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86년에 여왕은 급진 세력에 반대하는 연립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제3차 글래드스턴 내각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국민의 윌리엄'을 패배시킨 것은 여왕이 아니라 아일랜드 자치법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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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미망인 시절의 빅토리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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