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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왕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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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6월 20일 새벽, 윌리엄 4세가 죽자, 빅토리아가 그뒤를 이었다. 이날 아침, 추밀원은 새 여왕의 우아하고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 여왕은 몸집은 작았지만 당당했고, 은방울 소리처럼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년 18세인 처녀의 즉위는 낭만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여성의 왕위 승계를 금지하는 하노버 왕국의 살리카 계승법 때문에, 그때까지 영국 왕이 겸했던 하노버 왕위는 영국 왕위에서 떨어져나갔고,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들 가운데 연장자인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가 물려받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독방을 쓰지 못했던 여왕은 버킹엄 궁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를 여왕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콘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다. 레첸만이 여왕 가까이에 남았다. 외삼촌 레오폴트마저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정중한 경고를 받았다.

마침내 '혼자'가 된 빅토리아는 난생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특히 영국 총리인 멜버른 경과의 낭만적인 우정 때문에 더욱 신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멜버른은 빅토리아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대부분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총리는 새 여왕의 자신만만함과 국왕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의욕을 키워주었다. 그러나 여왕이 사회문제를 무시하도록 조장했고, 모든 불만과 소요를 극소수 선동자들의 활동 탓으로 돌리게 했다. 게다가 빅토리아는 멜버른 때문에 열렬한 휘그당원이 되었다.

빅토리아 치세의 첫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는데, 둘 다 빅토리아의 정치적 당파심 때문에 생겨난 위기였다. 이른바 헤이스팅스 사건은 빅토리아가 토리당과 관련이 있는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에게 임신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의사의 진단을 받게 한 것이 발단이었다. 진단 결과 여왕의 오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뒷공론이 무성했다.

그런데 그해말에 플로라 부인이 뜻밖의 질병으로 죽자, 훨씬 더 험악한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대관식(1838. 6. 28) 때의 뜨거웠던 대중의 열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또 한 차례의 위기는 이른바 '침실 위기'로서, 멜버른이 1839년 5월에 사임하자, 보수당(토리당의 후신) 당수인 로버트 경은 휘그당원 일색인 여왕의 시녀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왕은 멜버른의 격려를 받아 단호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래서 필은 총리직을 거부했고, 멜버른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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