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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4. 9. 9, 잉글랜드 콘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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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17. 12. 7, 런던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요약 영국의 제독.
유명한 선상(船上) 반란이 일어났던 왕실 소유 '바운티호'의 함장이었다.
7세 때 선실 급사로서 선원이 되었고 1770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772~75년에 제임스 쿡 선장의 2번째 항해에 참여했으며 쿡 선장의 마지막이자 3번째 항해(1776~80)에서는 '레절루션호'의 선장이었다. 1787년 215t급 '바운티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배는 서인도 제도에 이식할 빵나무를 타히티에서 채집해 실어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바운티호가 예정에 따라 타히티로 가서 빵나무를 채집하고 자메이카로 기수를 돌려 프렌들리 제도(통가)에 이르렀을 무렵인 1789년 4월 28일, 항해사인 플레처 크리스천이 갑자기 배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18명의 선원들은 배에 있던 대형 보트에 실려 쫓겨났다.
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반란자들은 그를 폭군이라고 비난했는데 그가 자기 배의 많은 장교들을 모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반란이 순전히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일어났으며, 선원들이 "타히티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영국에서보다 더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고 이것이 여자문제와 관련해 이 모든 일의 1차적 원인이 된 듯하다"고 주장했다.
덮개 없는 대형 보트로 약 5,800㎞를 항해한 놀라운 위업을 이룩한 블라이는 1789년 6월 14일 결국 동인도 제도의 티모르에 도착했다. 바운티호에 남은 크리스천과 나머지 8명의 선원들은 핏케언 섬에 상륙해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이 식민지는 1808년에야 발견되었는데, 아직까지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
나중에 타히티로 간 반란분자 3명은 영국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블라이는 이 반란사건에도 별다른 지위변화를 겪지 않았고, 1792년에는 다시 타히티를 방문하여 더 많은 빵나무를 서인도제도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디렉터호'의 선장으로 있던 1797년에는 노어 반란에 가담한 부하 선원들에 의해 해변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같은 해 그 배를 지휘하여 캠퍼다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도 '글래턴호'로 공을 세웠다.
1805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1808년 그의 '강압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이 또다시 반란으로 번졌다. 이번에는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스 군단장 대리인 조지 존스턴 소령이 반란을 지휘해 블라이를 체포했다. 그러나 결국 반란자들에게는 모반죄로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나중에 해군소장(1811)·해군중장(1814)으로 진급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터무니 없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사나운 입심과 거만한 태도 때문에 지휘관으로서 인기가 없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의심할 바 없는 용기를 발휘했으며 항해가로서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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