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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쿠시의 부모인 니콜라스 브랑쿠시와 마리아 브랑쿠시는 가난한 시골사람들이었으므로 당시의 다른 시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7세 때부터 목동으로 일하면서 처음에는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그뒤에는 카르파치아 산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나름대로 연장과 도구를 만들어 목각을 배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루마니아의 시골에서는 예로부터 목각을 이용해 숟가락이나 침대 기둥, 치즈 압축기 등을 만들거나 주택의 정면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장식 양식이 브랑쿠시의 여러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취미와 태도 및 생활방식은 착하고 단순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한편으로는 어린애 같으면서도 약삭빠른 듯한 시골 사람들의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는 9세도 되지 않아 일자리를 구하러 올테니아 주의 페스티사니 근처에 있는 티르구지우로 갔다. 맨 처음에는 염색공으로 일했으며, 2년 뒤에는 슬라티나의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그뒤에는 올테니아의 중심 도시인 크라이오바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러나 목각에 대한 취미는 여전하여 오렌지 포장용 나무상자로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훗날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고향에서 널리 연주되던 멜로디를 늘 연주하곤 했다. 또 나무로 백합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자질구레한 기술들이 한 제조업자의 주의를 끌어 1894년 그의 후원으로 크라이오바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갔으며, 거기에서는 특히 목공예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워야만 했다.
1896년 20세 때 처음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여, 빈으로 가서 체류하는 동안의 비용을 벌기 위해 목세공인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1898년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 학교에서는 전통주의자들의 작품보다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에 훨씬 더 이끌렸지만, 모형 제작과 해부학은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시절에 제작한 조각 가운데 〈해부 모형 Ecorché〉(1902)은 모교에서 사들였고 해부학 수업용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1903년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받아 루마니아 의학교육의 창시자인 카롤 다빌라 장군의 흉상을 만들었다. 바로 그해에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쿠레슈티까지 명성이 자자하던 파리의 오귀스트 로댕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로댕의 대담성은 전위파 예술가들의 열광과 전통주의자들의 분개를 동시에 야기시켰다. 루마니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진 브랑쿠시는 처음에 뮌헨으로 가서 1904년 봄까지 거기에 머물다가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은 돈이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꽤 부담스런 여행이었다. 그는 배낭을 메고 거의 걸어서 여행했으며, 더욱이 보덴제 호를 건너는 배삯을 마련하느라 시계를 팔기까지 하여 마침내 7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피렌체 르네상스의 거장들에 영향을 받은 전통주의자 앙토냉 메르시에(1916 죽음)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2년 동안 그와 함께 일했지만, 생계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계속 음식점에서 접시를 닦았으며 루마니아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만난 루마니아인들도 그에게 초상화 제작을 주문해 그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1906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전국미술협회 미술전람회에 출품했으며, 뒤이어 가을 살롱전에도 출품했다. 그의 첫 작품들은 로댕의 힘찬 작품에 영향을 받아 여전히 고전적이면서도 대단한 활력을 보여준다.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브랑쿠시는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07년 부유한 지주로부터 루마니아의 부자우 공동 묘지에 기념상을 만들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무릎 꿇고 있는 어린 소녀의 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의 양식이 단순해지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이무렵 그는 부쿠레슈티에서 해마다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이는 '티네리메아 아르티스티카' 전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작업실을 빌렸다. 1908년 얼굴 모습이 조형되지 않은 대리석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여인초상인 〈잠자는 뮤즈 Sleeping Muse〉의 원형을 마지막으로 적어도 로댕의 영향은 사라졌다. 바로 그해에 브랑쿠시는 처음으로〈입맞춤〉이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나중에 그의 특징이 된 기하학 양식을 확실히 드러냈으며, 이것은 그뒤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 특히 1910년부터 그의 동료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그의 조언에 따라 만들기 시작한 일련의 조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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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브랑쿠시의 초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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