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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슈바이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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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프가 소유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이 1235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엘베 강 하류와 베저 강 하류 사이의 지역에 설립되어, 벨프가의 시조인 사자공 하인리히의 손자 오토에게 주어졌다.

13세기말부터 이 영토는 벨프가의 여러 가계 사이에서 분할되기 시작하여, 수세기 동안 수없이 분할·합병·재분할되었다. 벨프 가계의 하나인 카렌베르크괴팅겐(하노버)가가 혼인으로 영국 왕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17세기에 주도세력이 되었고, 1714년에는 하노버 왕가로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영토의 끊임없는 분할과 군주들간의 다툼 때문에 이곳은 독일 정치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후 브란덴부르크와 그 후신인 프로이센 세력에 완전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스트팔렌 왕국에 합쳐졌으나 1814년 다시 합법적 통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작에게 반환되었는데, 그는 1815년 카트르브라스에서 패배했다.

그의 아들 카를 2세가 미성년인 동안 영국의 섭정궁인 게오르크가 이 공작령을 통치했다. 성년이 된 카를 공작은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1830년 혁명적 대격변 때 공국을 영원히 떠나야만 했다. 1831년에 공식적인 카를의 계승자로 선포된 그의 아우 빌헬름은 능력있고 인기있는 통치자였다.

1866년에 이르러 계승문제가 심각해졌다. 빌헬름은 미혼이었고 다음 후계자는 하노버의 전(前)왕 게오르크였는데, 그의 영토는 이미 프로이센에 합병된 상태였다. 프로이센의 반대 때문에 빌헬름 공은 브라운슈바이크 의회의 동의를 얻어 그의 사후 후계자가 계승할 수 없을 경우 정부를 이어받을 섭정단회의를 마련했다.

1884년 10월 18일 빌헬름이 사망하자 컴벌랜드 공작이자 하노버의 게오르크 5세의 아들인 에른스트가 자신의 왕위계승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하노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방회의는 그의 즉위가 제국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섭정단회의에서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섭정 황태자를 선출했다.

1906년 알브레히트의 사후, 브라운슈바이크 의회는 1907년 5월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섭정인 요한 알브레히트 공작을 후계자로 선출했다. 이 계승문제는 1913년 컴벌랜드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황태자가 정식으로 하노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인정되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유일한 딸인 빅토리아 루트비히 공주와 5월 24일 결혼하면서 해결되었다. 1919년 이후 이 공작령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자치국이 되었다.

나치 시대 동안 브라운슈바이크의 면적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1945년 영국 군정하에서 주로서 재성립되었으나, 1945년 11월 새로운 니더작센 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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