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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에서는 부채가 일상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부채를 들고 다녔으며, 제각기 특정한 목적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부채가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조정 신하들의 부채와 무사들의 부채가 서로 달랐고, 공식 다도를 위한 부채는 무대에서 사용하는 부채와 달랐다.
극동지방에서는 부채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 장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중국과 일본에서 만든 고급 부채의 장식은 사실상 어떤 것도 따라갈 수 없는 세련된 취향을 보여주었다.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부채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능공들의 일이었고, 기껏해야 솜씨좋은 장식가들이 이 작업을 맡았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많은 위대한 화가들이 부채 장식에 재능을 쏟았으며 예술작품들은 항상 실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 송(宋)나라말까지는 분명 둥글부채가 더 흔한 유형이었지만, 명나라(1368~1644) 때 접부채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접부채는 극동지방에서 발명되었고(7세기에 일본인이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유럽에는 중세에 동양의 접부채가 몇 개쯤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양의 동양식 부채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아마 15세기에 중국까지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인이었을 것이다.
그후 이것의 수입은 계속 늘어났고 17세기말에는 엄청난 양의 중국 부채와 그보다는 적은 양의 일본 부채가 유럽에 전해졌다. 이런 부채들은 품질 차이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유럽 시장을 겨냥한 제품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기준에서는 대부분 품질이 떨어지는 것들이었으나 복잡하고도 솜씨좋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앞다투어 동양 부채를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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