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423년(세종 5) 국가에서 화척·재인에게 농토를 주고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을 신백정이라고 개칭했다. 이는 이들이 일반농민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오히려 '백정'이란 용어가 천민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거나 별도로 부락을 이루어 살았으며 일반민과 통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착한 집단일지라도 일반인과 구별해 국역과 조세부담은 지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인집단으로 고정되었으며, 도살업은 이들의 대표적인 직종으로 전국의 도살업을 거의 전담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백정도 신분적으로 해방되었으나 일반민 사이에서 백정에 대한 인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일제하에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일어났다.
1423년(세종 5) 국가에서 이전의 화척(禾尺:楊水尺)·재인(才人)에게 농토를 주고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의 명칭을 신백정(新白丁)이라고 개칭했다. 이는 이들이 일반농민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오히려 '백정'이란 용어가 천민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계기가 되었다. 화척의 기원은 고려시대에 들어온 북방 유목민인 타타르인(韃靼人) 계통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조선시대까지도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거나 별도로 부락을 이루어 살았으며 일반민과 통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착한 집단일지라도 일반인과 구별해 국역과 조세부담은 지지 않았다.
다만 사옹원에 소속되어 1호당 1정씩 차출되어 수유(酥油) 제조의 역을 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역은 일반민보다 가벼운 편이어서 빈민들이 투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생업이 곤란한 경우 군도로 둔갑하는 일도 많았는데, 특히 고려말에는 왜구 못지않게 이들의 작란(作亂)과 약탈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세종대의 신백정 정책은 이같은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이후에도 이들은 쉽게 동화되지 않았으며, 일반 농민들도 이들과의 교류를 꺼렸다. 이들은 주로 수렵·도살업·고리[柳器] 제조와 판매 등에 종사했으며, 물자의 공납역을 지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작란이나 집단적 유랑이 줄었으며 대신 천인집단으로 고정되었다. 도살업은 이들의 대표적인 직종이었는데, 전국의 도살업을 거의 전담했다. 도살업과 육류 판매 이익이 높았고, 천민으로 국가에 다른 역을 지지는 않았으므로 몰락한 빈민들이 백정으로 투신하기도 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백정의 수효가 증가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백정도 신분적으로 해방되었으나 일반민 사이에서의 백정에 대한 인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일제하에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났다.→ 양수척, 임꺽정, 형평운동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