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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3년 결성된 전국적 규모의 운동 조직.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진주의 이학찬·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 등을 간부로 하여 조선형평사가 창립되었다. 창립 목적을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노선에 대한 갈등이 불거져 신파와 구파로 갈라졌다. 1931년 표면적으로는 구파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활동이 침체되었고, 1937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이후에도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4월 25일 진주의 이학찬(李學贊)·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 등을 간부로 하여 조선형평사가 창립되었다.
창립 목적을 계급의 타파, 공평한 사회의 건설,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여 전국에 지사 11개소, 분사 67개소, 회원 40만 명의 대규모 운동조직으로 성장했다. 1924년 3월에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대회에서는 형평운동의 혁신과 서울로의 본부 이전, 자본금 20만 원의 피혁회사를 설립하여 그 이익금으로 운동을 추진할 것 등을 결정했다.
1926년 9월에는 서울 중앙총본부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해방, 일반사회단체와 손잡고 합리적 사회건설, 형평운동의 원활화, 백정계급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등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별동 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조직하고, 아동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동맹·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기관지 〈세광 世光〉을 발행하는 등 활발하게 형평운동을 전개했다. 조직이 확대되고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1929년 4월 제7회 대회에서 박평산(朴平山)·이동환(李東煥)·서광훈 등 형평청년전위동맹 중심의 신파는 사회운동단체와의 협동전선론을 주장한 반면, 장지필·김종택(金鍾澤)·길순오 등의 구파는 전통적 수준의 운동을 주장하여 양 노선의 갈등이 깊어졌다.
1930년말부터 사회단체들의 해소 주장과 이듬해 봄 신간회의 해체에 영향을 받아 신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1931년 4월 경성에서 제9회 대회가 열려 신파의 해소건의안은 부결되고 10월의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장 장지필, 서기장 김종택이 선출되어 구파가 표면적으로 승리했다. 이후에도 신파가 해소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활동이 침체되었고 일제의 압력으로 1937년 5월 1일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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