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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와 혁명에 반대하는 버크의 입장은 자유주의 진영에 심도있는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므로 외형적인 측면에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가려내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지만, 보수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자유주의와는 명백히 대치되는 하나의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의식적·직설적이든 무의식적·암묵적이든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의 장에 '그리스도교의 원죄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간은 애당초 자유롭지도 선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무질서와 사악함, 상호파멸로 나아가기가 쉬운 존재이다.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얽어매는 사슬'이라고 단정했던 것(자아에 대한 사회적 제약으로서의 인습)은 버크 등에 있어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루소). 전통과 인습의 사슬은 개개의 인간을 뿌리깊고 영속적인 사회구조 속에 순응시키며 이러한 질서와 체제 속에서가 아니면 윤리적인 행동이나 책임있는 자유와 권리의 행사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보수적인 성향은 보수주의적인 정책노선이나 우파 경제학과 일치할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좌파 정치 및 경제 노선을 수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수주의적인 정치와 경제가 무엇이든간에 보수적인 성향은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인간본성과 뿌리없음, 시험을 거치지 않은 혁신에 대한 불신이며, 다른 하나는 이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중단없는 역사와 역사 속의 진화과정, 그리고 인간사를 이끌어가는 기본틀로서의 전통사회체제에 대한 신뢰감이다. 뿌리깊은 사회체제란 문화적·종교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추상적·실제적으로 표현된 바가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후자의 측면과 관련하여 많은 보수주의 정치가들은(프랑스에서는 소수이고 영국에서는 다수파임) 보수주의를 어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언어표현을 초월한 하나의 정신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열띤 논쟁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보수주의는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화하고 논리가 부여되며, 의식적인 사상운동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곧바로 그 자신이 경멸해온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를 닮아가게 된다. 이러한 영국적인 접근방식에 따르자면 연역논리에 의한 추론방식이란 지나치게 공론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18세기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정신이 관념화된 청사진을 의식적으로 모색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수주의의 이성은 무의식의 저변에서 구체적인 전통과 관례들을 형상화시켜나간다.
미래를 주장하기보다는 실질의 구현에 초점이 맞추어진 본질로 말미암아 보수주의는 그 최고의 통찰력에 이르러서도 자유주의나 급진주의만큼의 이론화 작업을 진행시킨 적이 없다.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기존 종교와 상호연관을 맺기도 한다(종교철학). 1789년 이후 종교계의 호소는 혼돈의 시기에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유럽인들의 열망을 배가시켰다. 특히 그 기원을 군주제적인 중세기에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보수주의의 이성에 호소하는 바가 컸다.
국교회의 신봉자였던 에드먼드 버크 역시 급진주의의 세력확장을 저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벽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을 칭송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의 주류를 형성했던 세력은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었으며 동시에 강력한 반교권주의자들이었다.
사회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조명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합리적인 청사진을, 심원한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공동체가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진화해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순수이성에 근거하여 무책임하게 공동체의 장래 모습을 재단해내는 성급한 기도라고 힐난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적 공동체를 분열된 잡다한 요소들이 단지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인 원자화된 사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동체사회는 종교와 이상주의, 공통의 역사적 체험, 오랜 기간을 두고 기능을 발휘해온 정치제도에 대한 믿음, 경애·상호협력·성실 등의 정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야 하며, 유물사관, 계급투쟁, 과도한 자유방임경제, 탐욕스런 부당이익의 추구, 지나치게 분석적인 인간지성, 함께 공유하는 사회제도에 대한 저항감, 의무보다 앞선 권리의 주장, 회의와 냉소의 기질 등은 인간공동체의 원자화를 가속시킬 따름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사회공동체의 관념을 사회는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극단론에까지 몰고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국면이 더이상 보수주의라고는 할 수 없는 전체주의 국가이론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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