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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만

다른 표기 언어 (Ernst) Ingmar Ber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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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8. 7. 14, 스웨덴 웁살라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 태생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6), 〈산딸기 Smultronstälet〉(1957), 3부작인 〈유리를 통하여 어렴풋이 Såsom i en spegel〉(1961)·〈겨울빛 Nattvardsgästerna〉(1963)·〈침묵 Tystnaden〉(1963), 〈고함과 속삭임 Viskingar och rop〉(1972)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다재다능한 촬영기술과 단편적인 담화체로도 유명한데 그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의 고독과 고뇌, 상처받기 쉬운 점을 침울하게 묘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훗날 자신의 사고와 도덕적 관념의 발달에서 어린시절의 성장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주 언급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명백히 종교적이지 않을 경우에도 그들은 언제나 은연중에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적 판단기준을 추구하고 행위와 동기에 대한 철저한 탐색에 몰두했다.

이러한 특징은 엄격한 종교적 가정에서 성장한 인물에 특히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유년기에 영향을 끼친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그가 접한 종교미술이었다. 특히 스웨덴의 시골 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서 이야기와 우화들을 소박하나마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그림들은 그를 매혹시켰으며 그의 관념들, 특히 악마로 형상화되는 악의 관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려는 강한 열망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미술·역사·문학을 공부했으며, 처음으로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본을 쓰고 연기활동을 하며, 학생작품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매스터 올로프스개르덴 극단과 사가스 극단에서 감독 수련생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작품 〈유령 소나타 Ghost Sonata〉를 인습을 벗어난 파격적인 연출기법으로 무대에 올렸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1944년 핼싱보리 시립극단의 정규감독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이 해에 스벤스크 영화사의 사장 칼 안데르스 뒴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뒴링은 베리만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아 〈고통 Hets〉(1944)의 각본 집필을 그에게 의뢰했다.

이 작품은 당시 스웨덴의 유명 감독이었던 알프 시외베리가 감독을 맡아 국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거둔 성공으로 베리만은 〈위기 Kris〉(1945)의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할 기회를 얻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5년 동안 각본을 쓰거나 감독을 한 영화들 혹은 각본 집필과 감독 역할을 동시에 한 작품들에는 베리만 자신의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당시에 자신이 직면했던 문제, 즉 변화하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 젊은이들의 불운한 사랑, 군복무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1948년말 직접 각본을 쓴 최초의 영화 〈감옥 Fängelse〉을 감독했다. 이 작품은 이전에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의 모든 주제들을 복잡하고,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야심적인 줄거리로 집약한 것으로, 악마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고를 기초로 하여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신예 감독의 공상과 전문가적인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를 두고 초창기 작품의 메시지라고 무조건 단정짓기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세계가 첨예하게 양분되어 있고, 선은 언제나 악의 그늘 밑에 있으며 낭만적인 이야기의 끝에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51년 스웨덴의 경제적 위기로 인해 스웨덴 영화산업 전반에 불황이 몰아닥쳤으며 베리만의 작품활동 역시 갑자기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2년 2편의 영화 〈시녀 Kvinnors väntan〉·〈모니카의 여름 Sommaren med Monika〉으로 작품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작품들은 베리만이 감독으로서 성숙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말뫼 시립극단 감독에 임명되어 1959년까지 일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2가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특징이 나타났다. 당시 기혼자였던 베리만은 영화의 주제면에서 결혼문제에 관해 계속적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하여 남녀 2명이 함께 살아가는 생활에 적응해가는 방식과 부부간 신뢰와 불신의 동기, 자녀 출산에 따른 반응 등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탐구해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작품제작시 믿을 만한 스톡 극단의 배우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작품과 그 작품의 해석에 명백한 일관성과 스타일을 부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55년 희비가 교차하는 로맨틱한 코미디 드라마인 시대물 〈여름밤의 미소 Sommernattens leende〉로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뒤 몇 년 동안 중세의 도덕을 주제로 삼은 〈제7의 봉인〉(1956)과 노년에 대한 명상을 다룬 〈산딸기〉(1957) 같은 대작을 비롯, 새로운 작품들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일종의 베리만 열풍이 세계 영화계를 휩쓸었다.

이에 따라 그의 초기 작품도 모두 발표되었으며 그는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교양있는 일반 대중들 가운데 훨씬 더 폭넓은 계층이 이전의 어떤 영화제작자들의 작품보다 베리만의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영화제작자가 전통적인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널리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베리만은 쇠하지 않은 활력으로 계속해서 영화와 연극을 제작했다.

3부작 〈유리를 통하여 어렴풋이〉·〈겨울빛〉·〈침묵〉은 온전한 정신과 광기, 인간의 접촉과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 사이의 경계를 다룬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최대 역작으로 간주된다.

이 시기에 그는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포레 섬에 시골저택을 마련했다.

이곳은 그가 만든 여러 편의 영화에 독특한 무대를 제공했는데, 그러한 작품들로는 〈페르소나 Persona〉(1966)·〈늑대의 시간 Vargtimmen〉(1968)·〈수치 Skammen〉(1968)·〈열정 En passion〉(1969)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소규모의 친밀한 인물집단이 겪는 내적 갈등을 다룬 것이었다.

최초로 영어대사로 만든 작품 〈접촉 Beröringen〉(1971)을 통해 베리만은 다시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좀더 낭만적인 주제를 다루게 되었지만 이 영화 역시 근본적으로 결혼생활에서 삼각관계에 빠진 인물들이 겪는 혼란을 그렸다는 점에서 포레 섬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뒤에 나온 밀접한 가족관계를 이해심있게 다룬 작품 〈고함과 속삭임〉(1972)·〈결혼 정경 Scener ur ett aktenskap〉(1974)·〈가을 소나타 Herbstsonate〉(1978)는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일반관객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일도 계속했는데, 특히 스톡홀름 왕립극단에서 주로 활동했다. 1977년 스웨덴 학술 아카데미의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스웨덴 영화협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우수 영화감독에게 주는 상을 제정했다. 이후의 작품들 가운데는 〈화니와 알렉산더 Fanny och Alexander〉(1983)가 있는데 이 영화는 19세기말~20세기초 스웨덴의 한 부유한 연극인 가족의 행운과 불행을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베리만에 대한 평가

베리만은 확고한 개성적 스타일로 한 인간이 그 자신과 타인들, 신(神)과 맺는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윤리의 문제를 검색하는 작품들을 직접 쓰고 감독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그 작품이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에 누렸던 세계적인 인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총체적 영화제작자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즉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이 소설이나 교향악, 또는 프레스코를 매체로 확신에 차서 자유롭게 그들의 사상과 인식을 표현했듯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인식을 표현한 작가이자 감독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이 대단한 인기를 누림에 따라 외부세계에서는 그가 그리는 스웨덴과 스웨덴의 기질이 스웨덴에 대한 처음이자 종종 유일한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스웨덴의 다른 영화작품들이 베리만의 작품과 매우 유사한 이미지로 비쳐지는 이유는 그의 개성적인 작품들이 스웨덴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웨덴의 다른 영화감독들에게 베리만이 끼친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데 있다.

인간 상황을 고뇌로 가득 찬 것으로 평가하는 그의 특징은 세월이 흘러도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를 추상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내기 위해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장식적인 요소들을 점차로 제거시켰다. 그는 인간이, 자신이 쓰는 가면 뒤에 실제 얼굴이 있는지 보기 위해 그 가면을 제거함으로써 자아를 규정하고자 하는 노력을 다루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배우로서의 창조자의 이미지와, 주술가로서의 창조자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베리만 자신은 사상가와 배우, 설교사와 사기꾼의 요소를 모두 구현하고 있었는데, 이같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대단한 힘과 개성을 지닌 예술가를 만들어냈으며 그의 작품은 언제나 어김없이 그 자신만의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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