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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 8. 16, 러시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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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2. 3. 9, 이스라엘 텔아비브 |
국적 | 이스라엘 |
요약 시오니즘의 지도자, 이스라엘의 총리(1977~83).
1935년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1930년대에 시오니즘 운동에 참가해 활동한 그는 1938년 요르단 강 양쪽 연안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쓰는 베타르 청년운동의 폴란드 지부장이 되었다. 독일이 1939년 바르샤바를 침공하자 그는 빌니우스로 달아났으며 그의 부모와 남동생은 집단수용소에서 죽었다. 소련 당국은 1940년 베긴을 시베리아로 추방했지만, 그는 1941년 석방되어 망명, 폴란드 군대에 들어갔으며 1942년에 이 군대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베긴은 호전적인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Irgun Zvai Leumi)에 가담했고, 1943~48년 이 단체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이르군은 베긴과 함께 헤루트당(자유당)을 결성했으며, 베긴은 1967년까지 크네세트(의회)에서 그 당의 총수 겸 야당지도자로 있었다. 베긴은 거국내각(1967~70)에 무임소장관으로 들어갔고, 1970년에는 리쿠드(통일)연합의 공동의장이 되었다.
베긴은 1977년 5월 17일의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하자 6월 21일에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1967년에 일어난 아랍-이스라엘 전쟁(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문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그러나 베긴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중동평화협상을 벌였고,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베긴은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80년대초 그는 팔레스타인인(人)의 국가 수립을 계속 단호하게 반대했다. 리쿠드당은 1980년 총선에서 절대다수표를 얻지 못했지만, 연립내각을 구성할 수는 있었다. 1983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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