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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 5. 20, 팔레스타인 데가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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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1. 10. 16, 이스라엘 텔아비브 |
국적 | 이스라엘 |
요약
다얀은 근처 아랍국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안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7년 야간특수부대에서 게릴라 전술을 습득하면서 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야간특수부대는 아랍 반란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조직되었고 이스라엘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스라엘 독립의 길은 오직 투쟁뿐이라고 확신한 그는 불법자위대인 '하가나'에 가담하여 약 2년간 투옥되었다. 출옥한 뒤에는 시리아에서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군을 지휘했다. 교전 중 왼쪽 눈을 잃었고 그 후 검은 안대가 그의 상징처럼 되었다.
1948년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지역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1953~58)으로 있으면서 1956년의 시나이 반도 침공을 계획하고 지휘했으며 이 전투에서 군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농업장관,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근처 아랍국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안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최초의 '키부츠'에서 태어나 최초의 성공적인 협동농장(모샤브) 나할릴에서 성장했다. 1937년 야간특수부대에서 영국 장교 오데 윙게이트로부터 게릴라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윙게이트). 야간특수부대는 아랍 반란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조직되었고 이스라엘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스라엘 독립의 길은 오직 투쟁뿐이라고 확신한 모세 다얀은 불법자위대인 '하가나'에 가담했고 영국 당국에 의하여 체포·구금되었다(1939~41). 출옥한 뒤에는 시리아에서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군을 지휘했다. 다얀은 교전중 왼쪽 눈을 잃었는데, 그후 검은 안대가 그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얀은 1948년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지역 사령관이 되었고 이듬해 요르단-이스라엘 휴전협상에 참석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1953~58)으로 있으면서 1956년의 시나이 반도 침공을 계획·지휘했으며 이 전투에서 군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전쟁회고록인 〈시나이 전투일지 Diary of the Sinai Campaign〉가 1966년에 출간되었다. 1959년 노동당연합 내의 '마파이' 소속으로 크네세트(의회)에 진출했고 오랜 후견인이었던 데이비드 벤 구리온 총리에 의하여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까지 장관직에 있었으나 벤 구리온 지지파와 신임 총리 레비 에슈콜 세력 사이에 알력이 계속되자 사임했다.
벤 구리온이 설립한 신당 라피(이스라엘 노동자동맹) 소속으로 1965년 하원의원에 재선된 다얀은 1967년 6월 1일 아랍 인접국들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참모총장 이츠하크 라빈과 함께 6일전쟁(1967. 6. 5~1967. 6. 10)을 지휘했으며 뒤에는 점령지의 행정을 담당했다. 다얀은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을 때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문책을 받았다.
1974년 6월 라빈이 골다 메이어에 이어 총리에 취임하자 내각에 기용되지 못했으나, 4년 후 메나헴 베긴내각의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긴 총리가 법적으로 요르단 영토이던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 이스라엘 주권을 행사하려 하자 1979년 10월 관직을 떠났다.
1981년 신당 '텔렘'을 창당했고 '1967년 전쟁'으로 획득한 점령지에서 무조건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자서전인 〈나의 인생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가 1976년에 출간되었다(→ 중동전쟁). 사망 후 그가 소장하고 있던 다량의 골동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정부의 승인도 없이 비과학적으로 발굴하여 수집한 것들이었다. 2번째 부인은 이 골동품들을 이스라엘 박물관에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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