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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뱅크

다른 표기 언어 West Bank
요약 테이블
위치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인구 2,790,300명 (2014 추계)
면적 5,655㎢
대륙 중동

요약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이 야심을 겨루는 중심지이다.
1949년 4월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협정에서 이 지역에 대한 요르단의 통치권이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아랍 점령지로서의 경계와 지위는 받아들여졌다. 1949~88년 하심 요르단 왕국에서 웨스트뱅크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동예루살렘을 제외한 전지역에 군정을 세웠다.
웨스트뱅크의 주요 팔레스타인인 도시로는 예루살렘 북쪽의 제닌, 나불루스, 람알라와 예루살렘 남쪽의 베들레헴, 헤브론 등이 있다. 1948년과 1967년의 전쟁으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되어 이곳을 떠났다. 1967~77년에는 약 6,3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동예루살렘에서 쫓겨났으며, 대신 유대인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웨스트뱅크(West Bank)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949~88년 하심 요르단 왕국에서 그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동예루살렘을 제외한 이 지역을 성서 지명을 따라 유대와 사마리아라고 한다.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이 야심을 겨루는 중심지로서, 지금의 경계선에 따르면 이전 위임통치지역의 일부이며, 1948년 유대인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랍군이 점령했던 지역과 일치한다(아라비아).

1949년 4월 3일에 있었던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협정에서 이 지역에 대한 요르단의 통치권이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아랍 점령지로서의 경계와 지위는 받아들여졌다.

휴전 협정 규정에 따른 웨스트뱅크는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과 예루살렘(국제연합[UN]의 분할계획에 따르면 국제지역이 되었어야 할 도시)을 잇는 돌출부를 제외하고 1947년 UN의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에 따라 아랍 점령지로 지정된 지역 가운데 하나와 대체로 비슷했다.

1948년 5월 영국 점령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자, 아랍 강대국들은 1947년의 분할계획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했다(중동전쟁). 그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분할계획에서 예상했던 영토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1949년 휴전 협정에서 공식화된 휴전선으로 웨스트뱅크의 이스라엘 국경이 확정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역(서예루살렘)과 요르단 지역(동예루살렘)으로 나누어졌다. 분할계획에 따라 수립 예정이던 아랍 국가는 결국 생기지 않았으며, 웨스트뱅크는 1950년 4월 24일 공식적으로 요르단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합병을 인정한 국가는 영국과 파키스탄뿐이었다.

1950년부터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군이 점령할 때까지 웨스트뱅크는 요르단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하심 왕조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불신과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웨스트뱅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열망 때문에 이스트뱅크와 웨스트뱅크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스트뱅크와 웨스트뱅크를 잇는 관계망이 발전하여 1967년 웨스트뱅크는 요르단 인구의 약 47%, 국내총생산의 약 30%를 차지했다.

1967년 전쟁중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를 점령하고, 동예루살렘을 제외한 전지역에 군정을 세웠다. 그리고 동예루살렘을 영토의 일부로 편입해 시민권을 주고, 이스라엘 법률을 시행했으며 민정을 실시했다. 점령 후 처음 10년 동안 이스라엘 당국에 대한 아랍인 시민들의 저항은 비교적 적었으며, 테러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이스라엘 정부에서 비교적 간섭을 거의 하지 않고 전화(電化) 사업과 주택 및 의료 제도 개선에 힘쓴데다가 실제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군에 저항하기가 어려웠고, 웨스트뱅크 아랍인들과 이웃 아랍인들, 특히 요르단령 이스트뱅크 아랍인들 사이에 동질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말에서 1980년대초 이스라엘이 보다 침략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이 휴전기간은 끝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방어 진지의 일부로서, 또한 농업 경제 확장의 일환으로 정착촌들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대초 이 마을들을 합친 총면적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마을 수는 수십 개에 이르렀다. 1948년과 1967년의 전쟁을 피해 오래 전에 이 지역을 떠난 아랍인 주민들의 토지·사업·건물 등이 몰수되었고,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의 시민생활을 제한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조치도 점점 늘어났다. 아랍인 소유권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이스라엘 당국이었으나, 정착촌들은 대개 경작하지 않는 땅이나 법적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메나헴 베긴 정부시절(1979~83) 정착촌의 수는 3배 이상 늘어났으며, 이스라엘인 정착민은 5배 이상 늘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채택된 규정에 따르면 웨스트뱅크 전체면적의 30~70%에 이르는 비경작지 또는 개인 소유지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하여 결국 웨스트뱅크를 조금씩 합병해가려 한다는 의심을 샀다.

웨스트뱅크의 영토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는 역사·종교·법·민족·언어·지역 또는 국제 정치적인 요소들이 얽혀 있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도 문제해결의 전망이 흐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특히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웨스트뱅크에 자치정부를 세우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과 협상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요르단, 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 결과 참여하게 된 이집트, 웨스트뱅크 아랍인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PLO) 등 이해 당사자들 가운데 어떠한 두 집단 사이에서도 협상이 계속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5개 집단 사이에서는 실제로 불가능했다. 이스라엘은 PLO와의 협상을 계속 거부해왔으며, 요르단 왕 후세인은 1988년 7월 31일 웨스트뱅크에 대한 모든 통치 책임을 포기했다. 그후 PLO는 웨스트뱅크, 동예루살렘, 가자 지구 등에 주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했다. 이집트와 미국의 여러 가지 제안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이스라엘에게는 자국의 이익을 해치는 것으로 보였으며, 웨스트뱅크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PLO에 대한 충성 외에는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1987년 12월의 폭동과 같은 웨스트뱅크 아랍인들의 폭동은,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웨스트뱅크 생활의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인티파다).

지형적으로 웨스트뱅크는 대부분 남북방향의 석회암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균고도는 700~900m에 이른다. 관습적으로 예루살렘 북쪽은 사마리아 구릉지대, 예루살렘 남쪽은 유대 구릉지대라 한다. 구릉지대는 동쪽으로 해면보다 낮은 요르단 강 대열곡과 사해를 향해 비탈져 있다. 웨스트뱅크 전지역이 요르단 강 하나로만 배수되는 것은 아니며, 서쪽 고지대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들이 서쪽의 지중해로 흐른다.

연강우량은 북서부의 가장 높은 지역에서 685㎜ 이상을 기록하며, 사해를 따라 남서쪽과 남동쪽으로 갈수록 적어져 100㎜ 미만이 된다. 물의 이용도에 따라 토지는 다양한 유형으로 이용된다. 비교적 물이 풍부한 구릉지대(특히 사마리아 구릉지대)의 관개되지 않는 지역에서 목양업과 곡물, 올리브, 멜론을 비롯한 과일재배가 성행하는 한편, 구릉지대와 요르단 강 유역의 관개지에서는 갖가지의 과일과 채소가 집약적으로 재배된다.

웨스트뱅크의 산업은 요르단 지배 시대에 제대로 발전하지 못해, 1960년대 중반까지도 30명 이상을 고용한 공장이 10여 개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점령 후에도 이스라엘 정부가 실제로 산업 발전을 막은 적은 없으나, 웨스트뱅크와 이스라엘 모두 투자자본이 부족해 1967년 이후 운송망만 크게 개선되었다. 운송망의 개선은 공급과 시장 서비스를 쉽게 함으로써 농업에도 혜택을 주었지만, 대부분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개선되었다.

웨스트뱅크의 주요 팔레스타인인 도시로는 예루살렘 북쪽의 제닌, 나불루스, 람알라와 예루살렘 남쪽의 베들레헴(바이트람), 헤브론(알칼릴) 등이 있다. 예리코(아리하)도 요르단 강 유역의 주요도시이다. 1970년대에 설립되거나 대학의 지위를 얻은 작은 대학교가 여러 개 있는데, 대부분 팔레스타인인 학생들이 다닌다.

1948년과 1967년의 전쟁으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되어 이곳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1948년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지역 출신인 팔레스타인인들 30만 명가량이 황폐해진 웨스트뱅크를 떠나 트란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으로 갔으며, 1967년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된 후에도 약 38만 명이 웨스트뱅크를 떠났다. 1967~77년에는 약 6,3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동예루살렘에서 쫓겨났으며, 대신 유대인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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