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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에는 진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박사라는 관직이 체계화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00년(영양왕11)에 〈신집〉을 편찬한 이문진을 태학박사라고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도 일찍부터 박사라는 관직이 있어,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백제의 역사책인 〈서기〉를 편찬했다. 또 백제 사람인 박사 왕인, 5경박사 고안무, 박사 단양이, 그리고 의박사·역박사의 명칭 등이 여러 기록에 나온다. 신라 역시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둔 것에서 이 관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에는 산술을 가르쳤던 산학박사, 의학·천문·율령을 교육했던 의학박사·천문박사·율령박사, 누각전에서 물시계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담당했던 누각박사, 문학을 담당했던 통문박사 등이 보인다.
중국에는진(秦)나라 때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 박사라는 관직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고조선 때였다. 위만(衛滿)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자 준왕(準王)이 그를 박사로 봉하고 서쪽 변방 100리의 땅을 주었다. 그러나 이때의 박사가 중국이나 삼국시대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직이었는지는 확실하지않다.
이 관직이 체계화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영양왕11)에 고구려의 역사책인 〈유기〉를 고쳐서 〈신집〉을 편찬한 이문진(李文眞)이 태학박사(太學博士)로 나타난다.태학은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의 귀족자제를 교육하기위해 설치한 학교로, 박사라는 관직을두어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도 일찍부터 박사라는 관직이 있어,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백제의 역사책인 〈서기〉를 편찬했다. 또 백제 사람인 박사 왕인(王仁), 5경박사(五經博士) 고안무(高安茂), 박사 단양이(段楊爾),그리고 의박사·역박사의 명칭 등이 여러 기록에 나온다. 신라에도 고구려·백제와마찬가지로 이 관직이 있었음은 682년(신문왕 2)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박사와 조교는 국학의 학생을 교육하는 책임을 담당했으나, 이 관직이 이때 처음 치된 것은 아니었다. 울진 봉평비는 524년(법흥왕 11)에도 박사라는 관직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 비문은 520년(법흥왕 7)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제가 정비되는 시기에 박사라는 관직도 설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에는 산술(算術)을 가르쳤던 산학박사(算學博士), 의학·천문·율령을 각각 교육했던의학박사·천문박사·율령박사, 누각전에서 물시계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담당했던 누각박사, 문학을 담당했던 통문박사(通文博士) 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라시대의 박사제도가 매우 체계적이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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