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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8. 1. 22, 인도 마드라스 포트세인트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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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 4. 11, 잉글랜드 서리 어빙거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식민지 행정관.
Sir F. D. Lugard라고도 함(1901~28).
동아프리카·서아프리카·홍콩에서 근무하면서 1888년~1945년 영국 식민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이지리아에서 고등판무관(1900~06)과 총독(1912~19)을 지내는 등 나이지리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01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28년 남작이 되었다.
인도에서 선교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루가드는 영국에서 교육받았고 샌드허스트에 있는 국립 군사대학에 잠시 다니다가 노퍽 연대에 들어갔다. 인도에 배치받아 1880년대 대영제국의 원정사업에 참여해 아프간·수아킨(수단)·미얀마 원정에 나섰다.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였던 그는 유부녀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는데, 미얀마 열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따라 동아프리카에서 아랍 노예잡이들과 싸우면서 그 일을 잊으려 애썼다.
1888년 니아사 호수 근처에서 노예 수송선의 방책(防柵)을 공격하다가 큰 상처를 입었으나 이때 아프리카와 영국을 위해 봉사할 자신의 과업을 발견했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영국이 아프리카를 합병하기 전에 설립한 특허회사였던 영국 동아프리카회사에서 일했다. 1890년 8월에는 몸바사를 떠나 비교적 문명화된 지역인 부간다 왕국까지, 거의 사람이 다닌 적 없는 1,300㎞의 길을 5개월에 걸쳐 대상(隊商)을 이끌고 탐험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교도·이슬람교도·개신교도 및 로마 가톨릭교도, 그리고 카바카라고 하는 이름뿐인 왕 사이에 복잡한 분규가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신교도와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일찍이 영국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집단들이었다. 루가드는 그의 단발 맥심 소총을 적절히 이용하여 18개월 만에 평화를 가져왔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서부까지 나아가 카바카에게서 충성의 조약을 얻어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특허회사가 손실이 많아짐에 따라 우간다를 포기할 계획이란 얘기를 듣고, 서둘러 영국으로 돌아와 2가지 요구를 내걸고 활동을 벌여 성취했다.
그중 하나는 영국이 계속 우간다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악평에 대한 시정이었다.
1894~95년에는 로열 나이저사에서 계획한 위험한 작전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보다 먼저 중앙 니제르를 답사하고 조약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그는 머리에 독약 묻은 화살을 맞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어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던 개인회사인 '브리티시웨스트차터랜드사'에 들어가, 다시 목숨을 걸고 니제르를 출발해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의 반(半)사막지대로 갔다.
이때 식민부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처음으로 공무원 임명장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당시 니제르에서 나일강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함에 있어 경쟁상대이던 프랑스인들을 다시 한번 이기기 위해 영국 장교가 지휘하는 아프리카군 연대를 창설하는 일을 맡았다. 이것이 유명한 '서아프리카 개척 군단'이 되었다. 이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그는 북나이지리아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80만㎢에 이르는 이 광활한 지역은 그때까지도 유럽인들에게 정복되지 않았으며, 답사조차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남쪽에는 이교도 부족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슬람교도 도시국가들이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곳 토후(土侯)들은 노예를 얻기 위해 남쪽 부족들의 땅을 침범했다. 루가드는 카노와 소코토의 주요도시국가들을 서둘러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능란한 외교 솜씨를 발휘하고 소규모 군사력을 신속히 활용함으로써 3년 만에 영국의 통치권을 확립했다. 그는 단 2차례의 지역적 폭동을 제외하고는 넓은 지역에 걸쳐 세력을 확립하고 협조도 얻어냈다. 그의 정책은 원주민들에 의한 국가 및 족장의 권리를 지지하고, 그들 자신의 법률과 법정을 갖도록 하며, 노예사냥과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원주민 통치자들을 통해 통치하는 것이었다.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에서 인력과 비용을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이 정책에 대해서는, 그가 기록한 정치 비망록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영국 식민지 행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때로 잘못 이용되거나 확대 사용되기도 했지만, 원주민들의 부족 체제와 민주주의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움직임에 도움을 주었다.
행정가로서 루가드의 결점은 남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으나 다양한 조건 및 광활한 면적은 이러한 결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를 비판하는 부하들도 몇몇 있었으나 대부분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많은 '루가드의 부하들'이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지배했다.
1902년 루가드는 미모가 빼어나고 유명한 플로라 쇼와 결혼했다.
이 여인도 대단한 여행가이자 식민정책에 관한 권위자였으며 런던 〈타임스 The Times〉지의 간부였다. 이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도왔다. 아내가 나이지리아의 기후를 견디지 못하자 루가드는 아프리카를 떠났으며, 1907년~12년에는 홍콩 총독을 지냈다. 광활하고 미개한 북나이지리아와, 문명화된 중국인들이 살고 복잡한 영국인 상업사회로 이루어져 있는 좁은 섬 홍콩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 개척자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발의로 홍콩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12년 나이지리아의 두 지역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국가로 만들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남쪽과 북쪽은 원래의 특성이나 그동안 받아온 영국의 통치 전통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 2곳의 행정을 통합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루가드는 모든 행정적 제도들을 완전히 하나로 통일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남부와 북부 사이의 이중성을 유지시켰다. 그는 북부보다도 남부, 특히 세상 물정에 밝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는 라고스와 동남부가 이해하기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1918년에는 아베오쿠타라는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큰 폭동을 겪기도 했다.
또한 그는 사회조직이 느슨한 이보 지역이나 동남부 종족들에게까지 간접통치 원칙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그의 재임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영국과 연락이 끊겼고 그결과 행정관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동쪽 국경에서는 카메룬의 독일군과 전투가 벌어져 사태는 한층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통일 과업을 대부분 성취함으로써 1914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나이지리아가 단일국가임을 선언했다. 역사가들은 나이지리아인들이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1960년에 하나의 통일국가로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고, 또 이보 지역이 1960년대말 비아프라라는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는 1919년에 은퇴했으나 계속 식민정부의 유능한 권위자로서 활약했다.
그는 〈영국령 열대 아프리카에서의 이중구조적 위임통치 Dual Mandate in British Tropical Africa〉(1922)라는 훌륭한 책을 썼다. 그는 1928년 어빙거의 루가드 남작작위를 받았고, 상원에서 식민문제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위임통치 상임위원회'및 '노예제 및 강제노동 문제 국제위원회'의 영국 대표위원과 '국제 아프리카 언어 문화 연구소' 소장직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아내를 잃고(1929) 크게 상심하여, 외딴집에서 영국 연방 안팎의 원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달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정력적으로 연구했다.
오늘날 식민주의 비판자의 눈에는 그의 사상과 행동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3번의 임기 동안 그가 이룬 업적, 즉 아프리카의 문호를 열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아프리카 행정체계를 확립한 점, 퇴임한 뒤에도 원로 정치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일을 한 점 등의 광범위한 업적과 성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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