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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74. 7.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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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29. 6. 7, 스코틀랜드 던바튼셔 카드로스 |
국적 | 영국, 스코틀랜드 |
요약
스코틀랜드의 왕(1306~29 재위).
본명은 Robert VIII de Bruce, Robert the Bruce.
개요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1328년 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확보함으로써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뒷날 생긴 그에 관한 여러 전설 가운데 그가 곤경에 빠져 잉글랜드인에게 범법자로 낙인찍히고 심하게 압박받을 때 거미가 끈질기게 거미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희망과 인내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문과 초기생애
12세기초 스코틀랜드로 온 앵글로노르만계(系) 브루스 가문은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 왕가와 관계를 맺었다.
로버트의 할아버지인 로버트 드 브루스 6세(1295 죽음)는 1290년 왕위가 비자 왕위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봉건적 종주권을 내세워 존 드 베일리얼을 왕위에 앉혔다.
로버트 드 브루스 8세는 1274년 태어나 아버지 로버트 드 브루스 7세(1304 죽음)에게서 캐릭 백작위를 물려받았으나(1292) 그뒤 1306년까지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혼란했던 1295~1304년에는 한때 반란 지도자 윌리엄 월리스를 지지한 듯했으나, 뒷날 다시 에드워드 1세의 신뢰를 얻었다. 이 시기에는 이후 스코틀랜드를 직접 다스리려는 잉글랜드에 대항해 그가 앞장서서 싸울 것을 알리는 징후가 전혀 없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306년 2월 10일 존 커민(별명은 '붉은 커민')이 덤프리스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회에서 살해당한 것이었는데 이는 브루스 아니면 그의 부하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존 드 베일리얼의 조카였던 커민은 왕위계승에서 경쟁자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브루스의 행위는 그가 이미 왕위를 차지하기로 마음먹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서둘러 스콘으로 가 대관식을 올렸다(1306. 3. 25).
스코틀랜드 왕
왕이 된 뒤 그의 처지는 매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의 주요성채들을 장악하고 있던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로버트는 퍼스 근처 메스번(1306. 6. 19)과 퍼스셔의 틴드럼 근처 달리(8. 11)에서 계속 패배해 아내와 많은 부하들이 포로로 잡혔고, 형제들 가운데 3명은 처형당했다. 자신은 도망쳐 북아일랜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래슬린 섬으로 피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1307년 2월 에셔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주요지지자가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드워드뿐이었으나, 몇 년 안에 수많은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그뒤 몸소 버컨 백작 존 커민(살해당한 붉은 커민의 사촌)을 패배시켰고 1313년에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차지하고 있던 퍼스를 함락했다. 그의 지지자들도 많은 전투를 벌여 갤러웨이, 더글러스데일, 셀커크 숲, 동부 변경지역 대부분을 정복하고 마침내 1314년에는 에든버러도 점령했다. 이 몇 해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도급 성직자들에게 지원을 받았으며 에드워드 1세가 1307년에 죽고 뒤를 이은 에드워드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뒤 스털링 수비대를 구하려던 대규모 잉글랜드군을 1314년 6월 24일 배넉번에서 격퇴했다(맥넉번 전투).
권력강화
잉글랜드는 로버트의 치세 말년에야 마지못해 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했다.
그는 1318년에 버릭을 함락했고 잉글랜드 북부를 계속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마침내 에드워드 2세가 1327년에 퇴위당한 뒤 에드워드 3세의 섭정정부는 노샘프턴 강화조약(1328)을 맺기로 결정했는데, 그 조건에는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모든 종주권을 포기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1314년 이후 여러 해 동안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썼고 장차 데이비드 2세로 왕위에 오를 아들이 1324년에 태어나기 전까지는 남자 상속자를 두지 못해 1315년과 1318년 2차례에 걸쳐 왕위계승에 관련된 법령을 제정했다.
게다가 1314년에 열린 의회는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법령을 공포했는데, 몰수한 토지는 그뒤 여러 특허장을 내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하사는 왕 지지자들의 세력을 크게 강화시켜주는 위험스런 결과를 가져왔다. 배넉번에서 기사작위를 받은 제임스 더글러스는 셀커크와 록스버러의 2주(州)에서 중요한 영지를 얻었는데, 그 영지는 뒷날 변경지대에서 더글러스 가문이 지니게 된 막강한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또한 1296년 이후 얼마간 행정이 중단되어왔으므로 로버트 1세는 행정업무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에는 재무 회계체제가 정상화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국새대장(國璽臺帳)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것이다.
로버트 1세는 말년의 몇 해 동안 건강이 나빠져 주로 덤바튼셔의 카드로스에서 머물다가 문둥병으로 죽은 듯하다. 그의 시신은 던펌린 수도원에 묻혔으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따로 떼어내 제임스 더글러스 경이 성지순례 때 가지고 갔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살해당했으며(1330) 어떤 전설에 따르면 누군가가 그 심장을 되찾아 멜로즈 수도원으로 가져왔다고 하나 이는 믿기 어렵다.
뒷날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민족의식의 대변자이자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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