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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1세

다른 표기 언어 Manuel I Comnenus
요약 테이블
출생 1122경
사망 1180. 9. 24
국적 비잔틴

요약 비잔티움의 황제(1143~80 재위)·군지휘관·정치가.

마누엘 1세(Manuel I Comnenus)

비잔틴의 황제, 군지휘관

ⓒ Tokle / wikipedia | Public Domain

셀주크 투르크족이 제국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던 시기에 비잔티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로마제국을 복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1118~43 재위)와 헝가리 공주 이리나의 아들로 아버지대에는 검소하고 보수적이던 궁정을 중세 서유럽에서 들여온 마상시합과 축제가 이어지는 쾌활한 장소로 바꾸어놓았다.

재위초에는 서방의 일에 골몰해 아나톨리아 평원에서 커가는 투르크족의 위협을 사실상 무시했으며 서방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다시 맺어 시칠리아와 안티오키아의 노르만족 경쟁자들에 맞섰다. 제2차 십자군 원정 때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그리스 영토를 방위했으나 1147년에는 시칠리아 함대에게 코르푸를 점령당했다가 2년 후 베네치아의 도움을 얻어 그 섬을 되찾았다.

1148년 동서 사이인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동맹관계를 강화했으며 1152년 콘라트가 죽고 나서는 콘라트의 후계자인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와 협정을 맺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154년 루지에로 2세가 죽자 함대를 보내 안코나를 공격했으며(1155) 풀리아 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1156년 브린디시에서 독일·베네치아·노르만의 연합군에 패배했으며 이후 비잔티움은 더이상 이탈리아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었다.

그뒤 마누엘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 생겨난 십자군 국가들에 자신의 권위를 행사했다. 1158년 실리시아(지금의 터키에 있음)에서 전투를 벌여 잃었던 땅을 되찾고 안티오크 군주인 샤티용의 르노와 예루살렘 왕 보두앵 3세에게 비잔티움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159). 또한 그는 세르비아인·헝가리인을 잘 다루었으며 1167년에는 달마치야·크로아티아·보스니아를 제국에 합병시켰다. 헝가리의 왕위분쟁에 개입해 1173년 자신이 내세운 후보자 벨로를 헝가리 왕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베네치아와는 1171년부터 10년 동안 관계가 끊어졌다. 마누엘은 다른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느라 동방의 투르크에게는 관심을 쏟지 못했다. 1145, 1146, 1160년에 이코니움의 술탄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1176년 투르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무렵 마누엘은 로마 제국을 복원하려는 꿈에 사로잡혀 이미 셀주크 세력의 성장한 힘을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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