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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9. 12. 8, 프랑스 생쥐스트라팡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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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2. 11. 28, 모나코 몬테카를로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모험가·무역업자·출판업자.
1873년 베트남 북부에서 프랑스의 세력기반을 다지려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뒤퓌는 1858년 이집트에서 무역업을 시작했고 1860년 중국으로 건너간 뒤 상하이[上海]에 머물다가 1년 뒤에는 한커우[漢口]에 정착했다.
그는 중국말을 배워 그곳 지방관리들과 친교를 맺는 한편, 군수품을 팔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갔다. 그는 훗날 자신이 1864년 이미 중국 남서쪽에 있는 윈난[雲南] 지방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탐사함으로써 이 강이 레드 강(중국에서는 위안장 강[元江])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와 프랑수아 가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스 탐험대가 1868년 한커우를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상업적 목적으로 레드 강 개발을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탐험대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윈난 지방으로 오고 있었는데, 그때 뒤퓌에게 레드 강을 통해 윈난 지방과 무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1871년 뒤퓌는 윈난을 출발해 레드 강을 따라 베트남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윈난의 수도 쿤밍[昆明]에 있는 자신의 중국인 고객 마주룽의 군대에게 레드 강을 이용해 상당량의 무기를 조달하는 계획을 세운 뒤, 파리로 건너가 공식적인 원조를 요청했다. 프랑스 당국은 공개적으로 지원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뒤퓌가 프랑스에서 대포를 구입하는 것을 승인했고 대포 운반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1872년 11월 뒤퓌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무장군대를 태우고 홍콩을 출발해 레드 강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기로 작정했다. 위협도 하고 뇌물도 쓰면서 베트남인들의 저지를 뚫고 마침내 윈난으로 수하물을 운반했으나, 하노이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도와준 베트남 동료들이 투옥되고 그의 배와 부하들은 앞으로 레드 강에서 장사를 못하게 된 사실을 발견했다. 뒤퓌는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인 마리 쥘 뒤프레 제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가르니에는 본국에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싸운 뒤 극동으로 돌아왔다.
뒤프레 총독은 가르니에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1873년 11월 하노이로 보냈다. 가르니에가 받은 공식 명령은 뒤퓌를 구해내는 일이었으나, 뒤프레에게서 구두(口頭)로 받은 비밀 지시는 베트남 북부 공격을 허락하는 내용이었던 듯하다. 가르니에는 뒤퓌의 협조를 받아 하노이 요새를 공격했으며, 레드 강 삼각주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배권을 확보했다. 가르니에가 12월 21일 피살되자, 이제까지 프랑스 정부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뒤프레 총독은 가르니에가 벌인 전투를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으며,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북부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뒤퓌의 탄원도 묵살했다.
뒤퓌는 이런 사건들 때문에 파산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로 진격해야 된다고 계속 주장했으며, 자신을 레드 강 상업적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내세웠다. 그는 많은 책을 썼으며 그 가운데 〈통킹 지방 문제의 근원 Les Origines de la question du Tong-kin〉(1896)과 〈1872년에서 1886년까지의 통킹 : 역사와 정치 Le Tonkin de 1872 à 1886 : histoire et politique〉(1910)가 가장 유명하다.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사업 초기에는 성공도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채 1912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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