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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3. 11. 25, 프랑스 알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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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1. 2. 8,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1871~74년에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남부 베트남) 총독을 지낸 프랑스의 해군 장교.
당시 프랑스 정부의 공식정책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반대했으나, 무역을 증진시키고 중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고자 통킹(북부 베트남)에 프랑스 통치를 확립하려고 했다.
1831년 간부 후보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1847년 소령을 거쳐 1854년 중령이 되었다. 크림 전쟁에 참전했으며, 1860년에는 시리아와 코친차이나 원정에 참가했다. 1864년에는 레위니옹 총독으로 임명됐으며, 1867년 해군소장으로 진급했다. 1870년 독일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중국과 일본 항구 봉쇄작전을 지휘했다.
1871년에는 4월 코친차이나 총독에 부임하여 1873년 프랑스 상인 장 뒤퓌가 레드 강을 이용해 교역하려 하다가 베트남 당국과 마찰을 일으키자, 그는 본국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무시하고 프랑스의 세력을 뻗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그는 하노이로 외교사절을 보내는 대신, 뒤퓌의 원조요청에 따라 해군 소령 프랑수아 가르니에가 이끄는 소부대를 통킹으로 파견하는 권한 밖의 일을 했다.
가르니에가 하노이 요새를 점령하는 등 승리를 거두자, 뒤프레는 이제 무력에 의지하기보다는 베트남 당국과 외교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사절 폴루이펠릭스 필라스트르가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에 가르니에가 살해되었다. 이때 뒤프레는 시치미를 떼고 자기는 부하들의 행동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가르니에가 죽은 뒤 필라스트르는 베트남 당국과 조약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이 조약에 따라 베트남 황제 투 둑은 1867년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서부 3개 지방을 합병한 사실을 인정하며, 북부의 중심지인 하노이·하이퐁·퀴논을 국제 무역도시로 개방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1874년 비준되었으나 투 둑은 프랑스에서 계속 일고 있는 반팽창주의 분위기를 이용해 조약을 무시했다. 한편 프랑스는 중국인들이 통킹 북서쪽의 밀수업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한 1877년에 와서야 이 조약을 맺은 사실을 중국에 알렸다. 1882년 무렵 프랑스의 정치 분위기가 바뀌자, 필라스트르의 조약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베트남인들과 마찰이 일어났으며, 1883~85년에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뒤프레는 1873년에 저지른 사건 때문에 1874년 소환되었다.
그의 주요업적은 통킹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지만, 통치지역 내정도 열심히 했던 행정관이었다. 공중보건 사업을 후원했고 실질적 대중교육 정책을 계획했으며, 프랑스식 행정을 담당할 사람들의 법률교육을 위해 사이공에 견습생학교(college de stagiaires)를 설립하는 일 등을 주관했다. 또한 베트남 법전을 보존하려는 필라스트르의 노력을 지원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는 해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로슈포르와 툴롱의 해양지사를 차례로 맡아 계속 일하다가 1878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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