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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세기 중엽, 시에나 시에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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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18경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중세 이탈리아 화단의 거장으로 시에나 화파의 창시자.
개요
이탈리아 비잔틴 미술의 전통이 그 뿌리인 고전시대의 예술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더욱 강화된 이탈리아 비잔틴 전통의 형식성을 고딕 양식의 새로운 정신성과 융합시켰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인 〈마에스타 Maestà〉(1311)이다.
초기생애
두초의 생애와 경력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생애는 대부분 그의 작품으로 판단되는 그림들, 그의 화풍이 발달한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증거, 그의 그림에 나타나 있는 학식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들이다. 두초의 아버지는 시에나 근처에 있는 부오닌세냐라는 마을 출신이었지만, 두초가 태어날 때쯤에는 캄포레조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시에나 자치단체의 출납 담당자가 서류 보관용 금고 12개를 장식해달라고 그에게 주문한 1278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시에나 재무부에서 사용하는 회계장부의 목제 표지 하나를 장식하는 일을 맡았다.
두초가 화가보다는 장인의 일을 했다고 해서, 이때까지 그가 아직 초보자에 불과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시에나와 피렌체에서는 이미 기반을 잡은 화가한테도 이런 종류의 일을 요청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가 문헌에 '화가'로 기록되었고 독자적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그가 1278년경에는 이미 성숙되고 독립된 미술가였음을 증명해준다. 1280년에 시에나 자치단체는 두초에게 100리라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는데, 그가 어떤 불법행위를 저질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다양한 이유로 여러 번에 걸쳐 상당히 많은 액수의 벌금을 물었으며, 이로 보아 그가 차분하지 못하고 반항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빚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번 벌금을 물었고 1295년에는 '포폴로' 당의 우두머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1302년에는 병역의무를 수행하러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금을 물었고, 그해 또 1차례 벌금을 문 이유는 속임수를 썼기 때문인 것 같다.
옥좌의 성모
1285년 4월 15일, 피렌체에 있는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성모 마리아 성가대는 '시에나의 화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에게 성모와 아기 예수가 다른 인물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담은 대형 제단화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그 대가로 그는 150플로린을 받기로 결정되었지만, 이 그림은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어야 하고 금으로 테두리 장식을 둘러야 하며, 만약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화가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는 조건이었다. 피렌체 국립 공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이 고용계약 문서는 1790년에 발견되어 1854년에 발표되었지만, 이 문서가 가리키는 그림이 오늘날 〈옥좌의 성모 Madonna Rucellai〉라고 부르는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마돈나라는 것이 명백하게 확인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제단화였던 이 〈옥좌의 성모〉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 화가로는 별로 뛰어나지 못했지만 가장 먼저 이탈리아 초기 미술가들의 전기를 썼고 그 방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화가)의 시대부터, 피렌체 화가인 치마부에의 걸작으로 여겨졌었다.
그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린 공적을 피렌체 화파와 그 창시자인 치마부에한테 돌리고 싶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겠지만, 〈옥좌의 성모〉에는 치마부에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 그림을 치마부에의 걸작으로 단정한 바사리의 견해는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이 그림이 두초의 작품이라는 것을 더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오늘날에도 일부 비평가들은 두초가 치마부에의 제자였고, 그의 미술의 본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치마부에를 모방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치마부에가 두초에게 상대적으로 미친 영향은 매우 복잡하다.
〈옥좌의 성모〉는 성모의 경건한 모습과 아기 예수, 그리고 이들을 경배하는 6명의 천사들의 얼굴 면에서 치마부에의 작품과 비슷하다. 그러나 공중에 떠 있는 천사들의 부드러움, 우아하고 섬세한 윤곽선, 프랑스 고딕 양식에서 느낄 수 있는 감미로우면서도 영적인 첫인상, 자유롭고도 뚜렷한 붓놀림으로 표현된 명암의 변화에서 놀라울 정도로 새롭고 혁신적인 화풍이 드러난다.
치마부에의 작품에 대한 두초의 지식이 그당시 두초의 화풍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두초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고, 또한 그가 받은 최초의 영향도 아니었다.
치마부에의 영향은 충분히 성숙한 시에나 화파 전통의 틀 속에서 이미 발달한 개인적 화풍에 뒤늦게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260~80년에 시에나는 그곳에 있는 웅장한 대성당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예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시에나 화가들이 잇따라 그린 주목할 만한 제단화는 수많은 화가들이 그곳에서 동시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 화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경향들은 그들이 지방에 고립되어 작품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치마부에를 비롯한 당시의 다양한 영향들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두초는 분명 이 화가들을 연구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쇠퇴해가는 비잔틴 미술의 전형적인 판에 박힌 자세에 서정적인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넘치는 인물들의 차분한 품위를 보여준 옛 화가인 구이도 다 시에나의 영향이 그의 회화 양식에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세례 요한 제단화 St. John the Baptist Altarpiece〉(시에나 국립미술관 소장)를 그린 거장으로부터는 비잔틴 미술의 복잡한 성상 묘사와 생생하고 짙은 채색의 영향을 받았다.
두초는 시에나 바깥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들어온 책의 삽화에 나타난 특징인 헬레니즘 양식과 양식화된 선의 결합, 그리고 그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고딕 세밀화의 생생한 색조, 서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의상, 몸짓의 양식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두초가 초기에 피렌체에 가서 치마부에를 만났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의 화풍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이고 꼭 필요한 사건은 아니다.
〈옥좌의 성모〉보다 먼저 그린 작품 가운데 두초의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림에는 치마부에의 영향이 루첼라이 제단화보다 훨씬 적게 나타나 있다. 두초가 〈옥좌의 성모〉를 그릴 당시 치마부에의 추종자에 불과했다는 결론은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무시한 견해이다. 그가 실제로 1285년에 피렌체에서 그토록 중요한 작품을 주문받았다면, 그무렵에 그는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고향인 시에나를 넘어 멀리까지 정평이 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후기에 주문받은 작품들
두초와 치마부에의 관계는 두초가 도안한 시에나 대성당 성가대석의 크고 둥근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에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1287~88년에 주문받은 이 작품은 이탈리아인이 만든 최초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두초가 〈옥좌의 성모〉를 완성한 뒤 20년 동안 시에나에서 활동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제 이 도시의 일류 화가가 되어, 1302년에 시에나 공회당 부속 예배당을 위해 제단화를 그렸는데,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 서명이 없고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몇몇 제단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일부는 분명 두초의 작품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천사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를 그린 작은 제단화이다. 이 제단화는 3명의 수도자가 옥좌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모 The Madonna of the Franciscans〉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절묘한 장식 효과를 부여하는 유연한 윤곽선에는 무르익은 고딕 양식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두초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은 시에나 대성당의 중앙 제단화인 〈마에스타 Maestà〉이다.
그는 1308년 10월 9일 금화 3,000플로린을 받기로 하고 이 작업을 맡았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미술가에게 지급된 사례금으로는 가장 많은 액수였다. 1311년 6월 9일, 시에나의 모든 주민은 이 도시의 성직자와 공무원을 앞세우고, 완성된 걸작을 가지러 화가의 공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북과 나팔 반주에 맞추어 대성당까지 엄숙하게 행진하며 그 그림을 운반했다.
3일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이 배부되었고,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일찍이 그토록 많은 대중이 한 예술품의 탄생을 그처럼 기뻐하며 축하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작품이 단지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만을 반영한 것이 아닌 진정한 걸작이라는 것을 그렇게 당장 알아차린 것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초 자신도 이 작품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고 성모가 앉은 옥좌에 경건하지만 의기 양양한 기도문을 적어넣었다. "성모 마리아여, 시에나에 평화를 주시옵고, 두초가 이와 같이 당신을 그렸으니 그에게는 생명을 주소서."
이 〈마에스타〉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꼭대기에 작은 뾰족탑들이 솟아 있고 아래쪽에는 프레델라(predella : 제단의 장식띠)라고 부르는 좁고 긴 패널이 토대처럼 붙어 있다.
앞면과 뒷면에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앞면 한가운데의 직사각형에는 성모와 아기 예수가 성인과 천사들에 둘러싸여 천국의 궁전 한가운데 놓인 옥좌에 앉아 있고 시에나의 수호성인 4명이 그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뒷면은 26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려넣었다. 프레델라의 앞면과 뒷면에는 예수의 어린시절과 행적이 그려져 있고, 전체 작품의 꼭대기에 얹혀 있는 뾰족탑에는 그리스도가 부활한 이후의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마에스타〉에는 모두 59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 패널의 인상적인 장면에는 성모를 경배하는 인물들이 성모 양쪽에 엄격한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런 대칭 구도는 비잔틴 미술의 전통적인 구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또한 〈마에스타〉가 성당의 공간 구성과 구조적 구성의 진정한 초점으로서 사람들의 눈길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점에서 두초가 건축에 대해 뛰어난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에 그려진 30명의 인물들은 마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의 구성원들처럼 매우 미미한 몸짓과 약간씩만 돌린 머리 모습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되풀이되는 그들의 자세는 진지한 서정적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명상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조화는 각 인물들의 용모에 뚜렷한 정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며 좀더 이상주의적인 헬레니즘 미술을 연상시키는데, 천사들의 얼굴에는 그런 경향이 더 나타난다. 다른 인물들보다 약간 큰 성모는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한 장대하고 육중한 대리석 옥좌에 앉아, 독실한 신자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이고 있다.
이리하여 두초는 힘과 위엄을 추구하는 비잔틴 미술의 이상에 시에나 정신의 근본인 부드러움과 신비주의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레델라와 뾰족탑 및 뒷면에 그려진 장면들은 두초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비잔틴 양식의 도상들로 가득 차 있는데, 두초는 이 장면들이 나타내는 의미에 좀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단순한 서술이나 연대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의 장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인물의 성격과 몸짓이 그 주변의 풍경 및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서정적 통합체를 보여준다.
말년
두초가 〈마에스타〉를 완성한 뒤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
그는 번창하는 화실을 갖고 있어서 거기에서 여러 작품들을 제작했지만, 그 대부분은 문하생들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1304년경에 시에나 근교에 있는 포도밭을 사들인 것을 보면, 그의 경제 사정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313년 또다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죽을 때, 그에게는 아내 타비아나와 7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식들 가운데 적어도 2명(갈가노와 조르조)은 화가였지만, 그들의 작품이나 공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직계 제자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조카인 세냐 디 부오나벤투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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