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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에서는 원래 독신이 관행은 아니었다. 이슬람교의 독신은 제사를 위한 정결, 제도적 통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 영혼의 향상이나 열정을 위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유명한 성자들은 결혼했다. 엄격한 훈련과 실행이 요구됨에 따라 여러 곳에서 수피(sufi) 신비주의 종교 단체가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 수도단의 단원들 사이에서조차 독신은 예외적이었다.
유대교에서도 독신은 거의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례 및 희생과 관련해서 또는 성전 중에는 성적 금욕기간이 규정되었다. 구약시대 이후에 에세네파의 일부는 결혼을 거부했다.
독신이 그리스도교에 처음 나타난 것은 종말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는 현세대가 끝나가고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으며, 새로운 시대에는 모두 천사들처럼 될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자신을 바치기 위해 가족생활을 포기했다. 사도 바울로는 독신을 칭송했지만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1·2차 라테란 공의회(1123, 1139)는 이론적으로 금욕적이 될 수 있다는 사제 결혼의 합법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제직이 정식 결혼에 장애가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기는 하지만 간혹 예외도 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들(루터교·성공회·개혁교회 및 기타)은 사제에 대한 독신 요구를 중단했다. 평신도의 독신 역시 중단되었지만 1845년경 영국 교회에 수도단이 다시 등장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소규모 개신교 수도단이 유럽 대륙에 설립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와 관련해 사제의 독신은 로마 교회에서 다시 논란거리가 되었다. 공의회는 결혼한 부제직을 인정했다. 공의회 이후에는 사제직을 떠나 결혼한 사제의 수가 급증했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사제들의 독신은 선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 파울루스 6세는 회칙 '사제들의 독신'(Sacerdotalis Caelibatus:1967. 6. 23)에서 독신에 관한 전통적 법규를 재확인했다.
교황은 〈신약성서〉로 되돌아가서 그리스도와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위해 사제는 완전히 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가정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자신을 채우고 사로잡는 초월적 실재를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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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서양종교에서의 독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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