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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01, 트리어 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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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64. 8. 11, 교황령 토디 |
요약
독일의 추기경·수학자·학자·실험과학자·철학자.
(독). Nikolaus von Cusa. (영). Nicholas of Cusa.
신과 우주에 관한 인간 지식의 불완전성을 역설했다.
1432년 바젤 공의회에서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트리어의 대주교로 추천한 후보자에 반대함으로써 그의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한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일치에 관하여 De concordantia catholica〉(1433)를 헌정했는데, 이 저서에서 그는 교회의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론을 지지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성직자의 일치에 대한 본보기를 천체의 질서에 관한 자신의 지식으로부터 이끌어내면서 교회의 조화에 관한 문제를 논했다.
그러나 1437년에 이르러 공의회가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필요한 개혁 입법을 제정하는 것에 실패했음을 알게 되자,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유게니우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1440년경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브릭슨(브레사노네)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450년에는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니콜라오 교황의 특사로 독일에 파견되어 2년 동안 일한 뒤, 브릭슨의 주교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예의바르고 박식하여 '르네상스인'의 본보기인 그는 신학·수학·철학·과학·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학식있는 무지에 관하여 De docta ignorantia〉(1440)에서 그는 유식한 사람을 자신의 무지를 아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책은 물론 다른 저서에서도 기하학의 상징을 이용하여 자기의 논지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는데, 인간의 진리탐구를 정4각형을 원으로 바꾸는 작업에 비유한 것이 그 하나의 예다.
그는 진단의학과 응용과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실험을 통한 지식을 강조했으며 지구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이 운동의 중심이 아닌 것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를 앞섰다. 식물의 성장에 관한 연구, 즉 식물이 대기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한다는 그의 주장은 생물학에 있어서 최초로 행해진 근대적인 실험의 결론이었으며, 공기가 무게를 갖는다는 사실에 관한 최초의 증명이었다.
그는 유럽 지도를 포함하여 수많은 분야에서 공적을 남겼다. 필사본 수집가로서 로마 시대의 저술가 플라우투스가 쓴, 분실되었던 12편의 희극을 다시 찾아내기도 했던 그는 방대한 장서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 장서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은 그가 1458년 고향에 설립한 병원 안에 학문활동의 센터로 남아 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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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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