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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사하라 사막 북부 아프리카 지역, 알제리 북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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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500,000㎢ |
대륙 | 아프리카 |
요약 로마인들이 사하라 사막 북부 아프리카 지역을 부르던 이름. 대체로 지금의 알제리 지방에 해당한다. BC 6세기부터 카르타고인들이 해안지방을 점령하면서 누미디아인이 카르타고 군대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BC 148년 로마는 누미디아 왕국을 여러 명의 족장에게 나누어주었다. 제3 레기온이 람바이시스에 영구 주둔하게 되자 누미디아는 안정을 찾아 1, 2세기에는 부유해지고 인구도 늘어났다. 로마 문명은 반달족 정복 이후 이곳에서 급격히 쇠퇴했고, 고유 문화가 다시 꽃피었다.
대체로 지금의 알제리 지방에 해당한다.
BC 6세기부터 카르타고인들이 해안지방을 점령하면서 누미디아인이 카르타고 군대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키르타(콩스탕틴) 근처에 살던 마실리족의 족장 마시니사가 다스리기 전까지는 반유목 생활을 했다. 마시니사는 처음에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으나 BC 206년 로마 쪽으로 전향해 물루카(물루야) 강까지의 넓은 영토를 로마에게서 받았고 카르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손에 넣었는데 아마 북아프리카 전체를 통치하려 했던 것 같다.
BC 148년 그가 죽자 로마는 누미디아 왕국을 여러 명의 족장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서자(庶子)로 태어난 왕자 유구르타가 118년 왕위를 빼앗고 누미디아를 재통일, 105년 로마가 다시 지배할 때까지 다스렸다. 누미디아 영토는 상당히 줄어들기는 했으나 로마는 속왕(屬王)을 임명해 계속 누미디아를 다스렸다. BC 49~46년 유바 1세는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우려고 다시 한번 시도했으나 타프수스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 영토에 아프리카노바(新아프리카)라는 새 속주를 만들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아프리카베투스('舊아프리카'라는 뜻으로 카르타고 주변의 영토를 지칭함)와 통합시켰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별도로 누미디아 속주를 공식적으로 만들었다.
제3 레기온(군단)이 람바이시스(람베사)에 영구 주둔하게 되자 누미디아는 안정을 찾아 1, 2세기에는 부유해지고 인구도 늘어났다. 원주민 자치체 몇 개가 무니키피움 지위를 얻기도 했으나 주민들 대부분은 로마 문명과 접촉없이 살았다. 3세기에 그리스도교가 급격히 퍼졌으며, 4세기에는 성직자들의 영적 상태를 놓고 벌어진 도나투스파(派)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문명은 반달족 정복(429) 이후 이곳에서 급격히 쇠퇴했고, 고유 문화가 다시 꽃피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8세기 아랍족에게 정복당한 뒤에도 고유 문화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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