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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때로는 지금의 튀니지와 대체로 일치했다. 로마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말기인 BC 146년에 카르타고를 격퇴한 뒤 이 영토를 얻었다. 처음에 이 속주는 BC 149년에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던 영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면적이 약 1만 3,000㎢에 이르는 이 영토는 타브라카에서 타이나이까지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수로와 제방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누미디아 왕국과 맞닿아 있었다. BC 100년경에 이 속주의 경계선은 좀 더 서쪽으로 진출하여, 거의 오늘날의 알제리와 튀니지 국경까지 이르렀다. BC 1세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프리카 속주에 통틀어 19개의 식민지를 세우자 이 속주는 크게 중요해졌다. 이 식민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카르타고노바였는데, 이 식민지는 급속히 성장하여 서로마 제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때로는 지금의 튀니지와 대체로 일치했다.
로마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말기인 BC 146년에 카르타고를 격퇴한 뒤 이 영토를 얻었다. 처음에 이 속주는 BC 149년에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던 영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면적이 약 1만 3,000㎢에 이르는 이 영토는 타브라카(지금의 타바르카)에서 타이나이(지금의 티나)까지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수로와 제방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누미디아 왕국과 맞닿아 있었다. BC 100년경에 이 속주의 경계선은 좀더 서쪽으로 진출하여, 거의 오늘날의 알제리와 튀니지 국경까지 이르렀다. BC 1세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프리카 속주에 통틀어 19개의 식민지를 세우자 이 속주는 크게 중요해졌다.
이 식민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카르타고노바였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콜로니아율리아카르타고라고 불렀다. 이 식민지는 급속히 성장하여 서로마 제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경계선을 더욱 확대하여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까지, 동쪽으로는 시드라 만 남쪽 끝에 있는 아라이필라이노룸까지 영토를 넓혔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기존의 아프리카 속주인 아프리카베투스(舊 아프리카)를 카이사르가 아프리카노바(新 아프리카)라고 이름지은 속주(옛날의 누미디아 왕국과 마우레타니아 왕국)와 합했기 때문에 오늘날 알제리 북동부에 있는 암프사가(지금의 루멜) 강이 이 속주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이 속주는 2세기말까지 이 면적을 대체로 유지했지만 2세기말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재위) 황제는 아프리카 속주 서쪽 끝에 새로운 속주인 누미디아를 정식으로 창설했다. 1세기 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개편하면서 기존 속주의 남부와 동부를 따로 떼어 비자케나 속주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를 창설했다.
로마가 병합한 원래의 영토에는 토착민인 리비아인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이들의 문화는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BC 122년에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아프리카 속주에 로마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로마의 농민과 투자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BC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의 유목민들의 저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과 아울러 로마의 식민지 건설이 이루어지자, 이 지역에는 그후 4세기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졌다.
1~3세기에 상당히 큰 사유지가 나타났고, 많은 공공건물이 세워졌으며, 곡물과 올리브 및 과일과 짐승 가죽을 수출하는 산업이 번창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리비아인의 대다수는 로마화했고, 로마 시민권이 제국 전체로 확대되기(212) 훨씬 전에 이미 이 지역의 많은 공동체가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차츰 제국 행정기관에 진출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배출하기까지 했다. 아프리카 속주는 또한 중요한 그리스도 교회를 가질 권리를 주장했는데, 256년에 이르자 이 교회에는 100명이 넘는 주교가 있었고,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 및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이 교회에서 배출되었다.
튀니지와 리비아에 있는 수많은 웅장한 로마 유적들은 로마 시대에 이 지역이 얼마나 번영했는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4세기말에 이르자 도시생활은 이미 쇠퇴해 있었다.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430년에 아프리카 속주에 도착하여 곧 카르타고를 반달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반달족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그후 533년에 비잔틴 제국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가 그들을 멸망시켰지만 아프리카 속주에 있던 로마 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상태에 접어들었다.
697년에 아랍인들이 카르타고를 점령했을 때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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