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9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자 네팔을 지배하던 라나 가문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과 실질적 자치를 보장받는 협정을 맺었다. 이후 네팔의 현대사는 민주주의적 전통이나 경험이 없고 오랫동안 전제정치에 물든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왕과 총리, 좌파 성향의 정당들은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켰고, 이 와중에 경제개혁과 같이 중요한 쟁점들은 채택되지 못했다. 왕정 타도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1996년 초부터 준동하기 시작한 마오쩌둥주의 반군의 존재는 정국의 불안을 한층 부추겼으며,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이어졌다. 네팔은 정치불안과 경제난, 힌두교 신자인 대다수 국민이 수용하기 어려운 지역·종족·종교 운동들을 비롯한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네팔의 초기 역사는 불교와 힌두교 색채가 강한 네와르족 전설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인도의 고전에도 네팔 골짜기와 낮은 구릉지대에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BC 3세기경 인도를 다스린 제왕 아소카가 네팔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5세기 리츠차비 왕조가 다스리는 동안 고립되어 있던 네팔 골짜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통해 무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지적·문화적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7세기 중엽에는 중국과 접촉하여 사절을 교환했다.
10∼18세기에 네팔은 말라 왕조 지배 아래 있었다. 약사 말라(1429경∼82 재위)는 왕국을 독립된 공국 3개로 나누었으며 이 공국들은 16세기까지 각기 독립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1769년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이끄는 구르카인(人)들이 네팔 골짜기를 정복했다. 그는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기고 네팔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1775∼1951년 네팔의 정치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패권을 쥔 귀족가문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왕실은 명목상으로만 지배층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자 네팔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1846년 이래 네팔을 지배하고 있던 라나 가문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1860년 네팔은 용맹무쌍한 구르카 부대의 영국령 인도군대 편입 및 네팔 외교권의 이양을 수용하는 대신 국내외 적으로부터의 라나 체제 보호 및 국내 문제에 대한 실질적 자치를 영국으로부터 보장받는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나자 막강한 외세를 상실한 라나 체제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1950년 11월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정치적 훈련을 받은 인도 거주 네팔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反)라나 혁명군이 트리부반 왕(1911∼55 재위)과 동맹을 맺고 라나 체제의 타도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네팔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NCP)이 이끄는 혁명군은 인도의 강력한 외교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1년에 라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네팔은 왕정으로 복귀했다.
네팔의 현대사는 민주주의적 전통이나 경험이 없고 오랫동안 전제정치에 물든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왕은 1959년에야 헌법을 승인했고 초대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NCP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NCP를 창설한 국민적 영웅인 B. P. 코이랄라가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코이랄라 총리와 마헨드라 왕 사이에 불화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1960년 12월 마헨드라 왕은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을 불법화하는 한편 NCP의 주요 지도자를 투옥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국왕이 실질적으로 전권을 장악하는 내용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인도와 중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반대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1972년 1월 마헨드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비렌드라가 왕위에 올랐다.
비렌드라 왕은 1970년대에 경제개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아버지 머헨드라 왕의 '비(非)정당' 정책을 견지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 정책에서 모두 실패해 1979년에는 체제 위기에 직면했다. 1960년 이후 처음으로 군주제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자, 그는 1980년 5월 비정당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비정당제에 대한 지지율은 55%에 머물렀다. 비렌드라 왕은 의원 직선제를 통한 정치제도의 자유화라는 유화책을 제시하고 NCP를 비롯한 '불법' 정당의 정치활동을 일정 부분 허용했다.
선거는 여전히 비정당 방식으로 실시되었지만 많은 후보들은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NCP와 급진적인 좌파 세력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NCP와 좌파 연합세력은 근본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가두시위와 파업이 전국적으로 계속 확산되자 정부는 유혈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른바 '1990년 봉기'는 최소한 45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비렌드라 왕을 굴복시켰다.
그해 4월 그는 정당활동 금지조치와 억압적인 포고령들을 해제하고, 크리시나 프라사드 바타라이가 이끄는 NCP와 온건 좌파 성향의 좌익연합전선의 연립 과도내각을 승인했다. 그해 9월 신헌법 초안이 마련되었고 왕의 역할, 정치 발전, 긴급권, 여러 언어의 지위 등의 많은 핵심 문제들을 둘러싸고 2개월 동안 열띤 논쟁이 벌어진 끝에 그해 11월 입헌군주제와 양원제, 복수 정당제를 골자로 하는 신헌법이 비렌드라 왕에 의해 공포되었다.
1991년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NCP가 하원의석 205석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차지하고 온건 좌파인 마르크스주의 좌익통일당(United Marxist-Leftist Party/UMLP)이 69석을 차지해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반면, 낡은 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은 고작 4석을 얻어 괴멸했다.
새 총리에 오른 NCP의 G. P. 코이랄라는 경제개혁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정책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의회의 불신임으로 1994년 7월에 사임해야 했다.
그해 11월에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NCP는 네팔공산당(United Communist Party of Nepal/UCPN)에게 제1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해 불안하게 출발한 UCPN의 만 모한 아드히카리 총리 내각은 결국 소수 내각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의회의 불신임으로 단명에 물러났다.
이때부터 네팔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다수당의 부재로 단명의 연립내각이 줄을 잇는 극심한 정국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왕정 타도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1996년 초부터 준동하기 시작한 하는 마오쩌둥주의 반군의 존재는 정국의 불안을 한층 부추겼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이어졌다.
네팔의 정치적 불안은 1999년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네팔 국민이 집권 여당인 NCP에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안겨 줌으로써 일대 전기를 맞았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14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역사적인 '1990년 봉기' 후 과도내각의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크리시나 프라사드 바타라이가 이끄는 내각이 출범했다. 이는 9년 만에 9번째 들어서는 정부였다.
네팔은 정치불안과 경제난, 힌두교 신자인 대다수 국민이 수용하기 어려운 지역·종족·종교 운동들을 비롯한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대중과 정당들의 압도적 지지로 민주 입헌군주제가 새로 출범했으나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정파들 사이의 대립·갈등을 넘어서지 못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옛 정권들이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외면했던 강력한 경제·사회 정책의 도입이 지체되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