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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군현(漢郡縣)의 하나인 낙랑군의 중국계 관리들과 그 지배하에 있던 토착세력들의 무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에 세운 4군은 설치된 뒤 대부분 소멸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지만,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평양 일원을 중심으로 BC 108~AD 313년까지 존재했다. 낙랑군의 군치였던 평양지방에는 낙랑관인들과 그 지배하에 있던 토착세력들의 무덤들이 수천 기(基)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무덤들은 중국적인 요소와 이 지역의 토착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독특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낙랑고분의 대표적인 형식으로는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을 들 수 있다.
덧널무덤은 땅을 파고 네모난 덧널[槨]을 구성한 후 그 안에 널[木棺]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전체를 흙으로 덮는 형태의 고분이다. 1명만을 매장하는 홑무덤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부부합장의 어울무덤 추세로 나아간다. 부부합장의 경우도 두 사람의 덧널을 각기 따로 만드는 이곽합장(異槨合葬)에서 부부를 동일한 덧널에 매장하는 동곽합장(同槨合掌)으로 바뀐다. 이러한 부부합장을 위해서는 후대의 추가장이 필수적이므로 덧널에는 출입문이 달리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부만이 아니라 3~4명을 매장하기도 하여 가족장의 면모를 보인다. 대표적인 덧널무덤 유적으로는 일제시대에 조사된 석암리9호분·왕우묘(王墓)·왕광묘(王光墓)·채협총(彩篋塚)·오야리 19호분 등이 유명하며 최근에 정백동·정오동 일대에서 다량의 덧널무덤이 발굴조사되었다. 이러한 덧널무덤에는 다수의 껴묻거리가 들어 있는데 그 종류가 칠기·토기·청동거울·무기·말갖춤[馬具]·수레부속품·꾸미개[裝身具] 등 매우 다양하다. 껴묻거리는 한(漢)의 요소가 강하며 여기에 북방 요소와 토착 요소가 융합되는 낙랑문화의 특성을 보여준다. 덧널무덤의 연대는 대략 BC 1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걸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벽돌무덤은 땅을 파고 벽돌로 방을 구성하여 지상에까지 축조한 형태이다. 널방[玄室]의 평면은 방형인 경우가 많으며 흙의 압력을 지탱하기 위해 배가 약간 부른 형태를 띤다. 외방무덤이 주류이나 널방 앞에 앞방을 마련하거나 앞방 옆에 옆방까지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벽면은 위로 올라가면서 차츰 좁아져 둥그렇게 휜 궁륭상천장을 이룬다. 벽돌무덤은 1세기 후반부터 4세기까지 이용되었다. 후기에는 벽돌과 깬돌을 섞어 쓰는 경우도 보이고 있어 벽돌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정백리 1호분·219호분·221호분, 도제리50호분, 토성동2호분, 남사리2호분 등이 대표적인 벽돌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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