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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

다른 표기 언어 安東都護府

요약 당나라는 초기의 영토 확장에 따라 변경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민족을 지배했는데, 안동·안북·선우·안서·안남·북정 등 6개가 그것이었다. 당은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임명하고 이들 지역을 총괄하도록 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반당적인 호민 2만 8,000여 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후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다시 신성(지금의 푸순 근처)으로 옮겼는데, 당시 말갈과 통해 반당운동을 꾀한 보장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듯하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안동도호부가 폐지되었다가 704~705년경에 복구되어 요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758년경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중국 당나라는 초기의 영토 확장에 따라 변경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민족 지배를 관장했는데, 안동(安東)·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등 6개가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되었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임명하여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키며 이들 지역을 총괄하게 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반당적인 호민(豪民) 2만 8,000여 호(戶)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검모잠이 이끄는 고구려의 부흥군이 평양 부근에서 크게 활동하자 669년 당은 그 주둔군을 요동성(遼東城:지금의 랴오양[遼陽])으로 옮겼다. 그후 675년 매소성 싸움, 이듬해의 기벌포 해전에서 당군이 신라군에게 대패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 677년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遼東都督朝鮮王)으로 봉하여, 앞서 당으로 데려갔던 주민들과 함께 고구려 유민을 요동에 안집하게 했다. 이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도 안동도호부의 관리로 파견되었다. 이해에 안동도호부는 다시 신성(新城:지금의 푸순[撫順] 근처)으로 옮겨져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보다는 보장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 듯하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과 통하여 반당운동을 꾀해 다시 당으로 소환되어갔고, 이에 가담한 고구려인들도 함께 많이 끌려갔다. 그뒤 698년 발해의 건국과 함께 안동도호부는 폐지되었고,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요동도독으로 파견되어 고구려 유민을 통치했다. 704~705년경에 도호부는 복구되었는데 714년 평주(平州)에, 743년에는 요동으로 옮겼다. 당시의 임무는 말갈국을 견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점차 그 실권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가 차지하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사(安史)의 난을 거치면서 758년경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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