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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0. 12.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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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8. 12. 23, 프랑스 블루아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 종교전쟁 때 가톨릭 진영과 신성동맹(神聖同盟)을 이끈 프랑스의 귀족.
별칭은 Henri de Guise, le Balafr.
기즈 공작 2세인 아버지 프랑수아가 죽었을 때(1563) 13세였던 그는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콜리니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간직하며 자랐다.
투르크인들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경험을 얻기 위해 1566년 빈으로 갔지만 참전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고국으로 돌아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종교전쟁에 가담, 용감한 활약을 보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럼에도 파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572년 왕의 모후(母后)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그녀의 생각과 반대되는 정책을 실시하도록 왕에게 압력을 넣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을 제거하기 위해 기즈 일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제독의 생명을 노린 시도가 실패한 뒤 기즈는 비밀회의에 참석(8.23),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위그노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8월 24일 직접 콜리니 암살을 지휘해 성공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를 했으나, 그외에는 학살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100명의 위그노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다음해 그는 별다른 경쟁자 없이 가톨릭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나바라의 엔리케와 자기 아들 알랑송 공작(뒤에 앙주 공작)인 프랑수아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즈에게 의지했다.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르자(1574. 5) 기즈 공작은 파리 사람들의 사랑은 물론 궁정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575년 10월 그는 도르망에서 독일군에게 승리해 파리 사람들의 불안을 씻어주었다. 이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흉터를 얻어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흉터있는 사내'(Le Balafré)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즈의 높아가는 인기를 두려워한 앙리 3세는 위그노들과 화해했다(1576. 5).
앙리 3세의 이런 행동을 배신이라고 생각한 그는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귀족들로 이루어진 신성동맹을 만들었다.
그러자 앙리 3세는 자신이 직접 기즈의 움직임에 맞섰다. 푸아티에 강화(1577. 9) 뒤 왕과 기즈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왕은 새로운 총신(寵臣)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기즈는 자신의 가문과 스페인 왕가 사이의 유대를 강화해 1578년부터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서 자금을 받기 시작했다.
1584년에 나바라의 엔리케가 왕위 계승자로 내정되자 그의 왕위 계승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신성동맹이 부활되었다.
기즈는 자신이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 '세 앙리 전쟁'에서 기즈는 다시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내몰았고 파리로 들어가 아무 저항없이 '파리의 왕'으로 군림했다.
1588년 5월 12일 파리 시민들이 앙리 3세에 반대해 폭동(바리케이드 사건)을 일으켰으나, 기즈는 왕위를 차지하는 대신 시민들을 달랬고 앙리 3세는 샤르트르로 도망쳤다. 국왕은 7월 연합 칙령을 통해 신성동맹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8월 4일에 기즈를 프랑스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앙리 3세는 기즈를 살해하기로 결심했으며 12월 23일 기즈는 용의주도하게 짜인 함정에 빠졌다. 왕의 호출을 받고 회의장을 떠나던 기즈는 국왕 근위대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렸다. 그는 다음날 살해당한 동생 기즈 추기경 루이 2세와 함께 화장되어 루아르 강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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