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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제국 말기 이후 근대적 관점에서 창작된 한국의 춤에 대한 반응과 평가.
한국 근대춤이 출현하던 당시는 전세계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함께 진행되던 때로 한국에서도 전통 농경사회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생활·문화양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한국 근대춤은 도시형의 춤을 요구하고 주목하던 이러한 시대의 결과이며, 그 실제형태는 무대공연의 작품이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유입된 자본제적 생산방식은 춤의 유통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이전까지 생활공동체의 춤이 주축을 이루던 한국의 전통춤은 전통사회의 해체와 함께 퇴조하였다.
이러한 사회추세를 반영하여 신무용은 춤의 대명사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춤의 실제가 변함으로써 춤의 개념·영역에서도 변화가 뒤따랐다. 이전의 춤이 지녔던 종교성·의식성(儀式性)이 사라지면서 이를 예술성이 대신하게 되었다.
극장춤과 극장춤의 대명사인 신무용만을 진정한 무용·예술로 여기게 된 것도 여기에 근본원인이 있다.
그 이래 춤 개념은 뚜렷이 춤과 무용으로 이원화되어 토착용어인 춤은 하급의 춤 행위를, 외래용어인 무용은 고급의 춤 행위를 의미하게 되었다. 가치론적으로 춤 용어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신무용이 퇴조를 보이는 1980년대의 일이었다.
신무용이 '개인'의 '자율적 표현'을 존중한 것은 근대 예술 일반의 이념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새로운 춤 양식의 예술적·생활적 논리가 미흡한 상태에서 강조된 개인성·자율성은 예술지상주의로 귀납되는 것이어서 한국 근대춤이 생활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은 피치 못할 현상이었다.
특히 신무용이 상징하는 근대춤의 '새로움'은 전통춤의 본성과 한계를 반성하는 가운데 이끌어내야 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무용은 당시 사회의 변화과정을 수동적으로 따르면서 전통춤 공간의 고유의 미적 본질을 소홀히 한 채로 전통춤 움직임의 형식을 받아들이는 모순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농경공동체로부터 도시공동체로 이행하는 사회추세에 대해 '무대에 적합한 창작'을 먼저 내세운 신무용의 관념이 기존의 춤 양식, 즉 전통춤 일반에 대한 견실한 대안이 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한국 근대춤의 역사에서 춤과 사회 사이의 심각한 부조화 현상을 빚었다.
초창기부터 1980년대까지 대다수의 춤 공연이 동호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이와 함께 신무용이 춤의 대명사로 됨으로써 춤 개념이 무대춤 일변도로 좁혀지는 결과를 낳았고, 무용시풍의 춤이 풍미한 것은 근대춤에서 춤 행위의 고답적 주관화와 신파적(新派的) 감정노출을 인습화하는 폐단도 낳았다.
신무용의 이같은 한계는 근대 한국춤뿐만 아니라 근대 한국 신문화의 한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신문화의 단계를 넘어선 시기인 1980년대 초반에도 신무용적 근대춤이 관례화되었던 사실은 근대 한국춤의 현실성 부재를 의미한다.
근대 한국춤이 처음 출발할 때 지녔던 몇몇 근대적 지향점, 즉 무대양식과 창작체제의 도입 및 춤의 고유한 독립성 확보 등의 가치는 현대 한국춤으로 이월되면서 다시 실험되어야 하는 과정에 있다.→ 무용극, 신무용, 창작춤, 한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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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국 근대춤의 시각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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