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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다른 표기 언어 具本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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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6년 3월 7일, 서울
사망 1953년 2월 2일, 서울

요약 한국 야수파 화가의 독보적인 존재인 20세기 초 한국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친구의 초상>. 호는 서산이며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미술연구회에 입회해 서양화를 배웠고 그림 외에도 비평을 통해 일제시대 한국미술의 원점과 한계를 비판했다. 1934년 목일회 활동을 하면서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서구적 전위미술을 구사하다 목일회가 활동을 마감한 후 국내 화단이 친일성향으로 기울게 되면서 미술활동을 그만 뒀다. 소설가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이 유명하다.

호는 서산. 어려서 척추를 다쳐 곱추가 된 그는 화가의 길이 곧 숙명이라고 여겨 18세에 고려미술연구회에 입회, 이종우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그 이듬해 YMCA 청년학관 미술과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1921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조각부에서 〈머리습작〉을 출품해 특선에 뽑혔고, 22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거쳐 일본대학 전문부 미학과를 다녔다. 1930년 자유로운 화풍을 펼치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고, 1933년 졸업 후 귀국하여 시인 이상(李箱), 소설가 김유정 등과 친분을 두텁게 하며 문화의 불모상태에 있던 일제시대 모더니즘 미학의 토착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당시 출세의 지름길인 선전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관전에 대해서도 '선장없는 기선'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예리한 비평적 안목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때문에 그의 미술과 문화적 활동은 일제시대 한국미술의 원점과 한계를 알려주는 현주소이기도 했다. 1934년 목일회(뒤에 목시회로 바뀜)를, 1935년 백만회를 창립해 왕성한 전위미술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국내 화단에서는 구본웅·이중섭·김환기·유영국이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추상미술 등 서구의 전위적 화풍을 소개했다. 이들 제2세대 화가들의 등장은 도쿄 미술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아카데미 화단에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일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했고 국내 화단은 친일성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구본웅은 1942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양화가의 수묵화전을 끝으로 붓을 놓기에 이르렀다. 해방직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천거되었으나 출품을 거부했다. 1953년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삽화 등을 그렸으나, 그해 2월 47세의 나이에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는 〈머리습작〉(조각, 1927)·〈비파와 포도〉(1930년대)·〈여인〉(1930경)·〈친구 이상(李箱)〉(1930년대) 등이 있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한국근대미술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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