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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 12. 22, 황해 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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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1. 2. 7,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서양화가.
호는 설초(雪焦). 대지주였던 아버지 태건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 평양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15년 공진회 미술전람회에 수채화로 입선하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1923년 도쿄[東京]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 도화교사로 있었으며 이듬해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다.
1925년 최초로 파리에 유학하면서 벨라루스인 슈하이에프의 연구소에서 고전적인 서양화법의 정확한 데생과 사실적인 묘사를 배웠다. 파리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남자 나체상〉(1926)·〈응시〉(1926)·〈루앙 풍경〉(1926)·〈모부인상 某婦人像〉(1927) 등의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주로 사실적인 묘사를 기초로 하여 조형성을 갖춘 작품들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살롱 도톤느 전람회에 〈모부인상〉·〈인형이 있는 정물〉(1927)을 출품하여 입선되는 등 그의 생애 중 가장 활발히 그림에 전념했던 시기였다. 귀국 후인 1928년 평양의 삭성회(朔星會)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지도하는 한편 동아일보사 주최로 귀국개인전을 열어 30여 점을 선보였다. 이후 서화협회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나부〉(1935) 등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화단의 형성에 기여했을 뿐 더이상 작품의 발전에 이르지는 못했다. 1934년에는 장발·임용련·구본웅·김용준·길진섭 등과 함께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 때문에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45년 8·15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 위원과 조선미술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대한미술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계속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작품활동은 활발하지 않았으나 이전의 고전적인 사실주의 작품에서 벗어나 사생(寫生)을 중심으로 한 풍경화를 주로 제작했다. 이후 홍익대학교 교수를 거쳐 홍익대학교 학장에 취임했고 1961년 예술원상,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74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회고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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