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신민회가 세운 최초의 해외 독립군기지. 이들은 토지와 농업을 발전시켜 경제적인 자립을 하기 위해 경학사를 조직했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신흥강습소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후 연이은 흉작과 질병의 유행으로 경학사 사업이 무너졌고, 이에 삼원보기지의 선발대였던 이회영 등이 근거지를 퉁화 현 허니허로 옮기게 되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실력양성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의 창건을 계획했다.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군이 국외에서 공격하고 안에서 봉기함으로써 일거에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함이었다.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강점되어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전개가 불가능하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교육·출판·문화 사업을 담당할 간부와 회원을 제외한 국내 간부의 일부도 집단적으로 서간도(西間島) 지방에 이주하여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려고 했다.
신민회의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의 선발대인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일가는 1911년 1월 횡도천(橫道川)의 연락처를 거쳐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가[鄒家街]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뒤이어 도착하는 이주민과 함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1911년 4월 봄 토지개간과 농업경영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단(民團)으로서 경학사(耕學士)를 조직했으며,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했다.
신흥강습소는 40여 명의 애국청년을 배출했으나 경학사 사업은 흉작과 수토병(水土病)의 유행으로 많은 이주민들이 사망함에 따라 실패했다. 이에 경학사는 해체되고 이석영(李石榮)·이회영·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김창환(金昌煥)·윤기섭(尹琦燮) 등은 1912년 가을부터 1913년 이른봄에 걸쳐 근거지를 싼위안푸 쩌우자가로부터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퉁화 현[通化縣] 허니허[哈泥河]로 옮기게 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