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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발행 조선일보 호외(1937년 07월 09일)
매일신보 호외(1937년 07월 20일)

기사 원문

조선일보 호외 1937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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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 중의 일중(日中) 양군(兩軍)

전면적으로 수(遂)각주1) 충돌

[북평 9일발 동맹 지급보] 노구교(蘆溝橋) 일중 양군 대치의 자세는 드디어 야습(夜襲)을 개시한 모양으로 9일 오전 1시 반경부터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의 작음(炸音)각주2) 이 끊일 틈 없이 암야(暗夜)의 공중에 은은히 들려와서 전투는 철소(徹宵)각주3) 계속되고 있다.

중국 측의 태도 강경
[북평 9일발 동맹] 호구교(芦溝橋) 사건이 중대 발전화함에 비추어 빙치안(馮治安), 진덕순(秦德純), 장자충(張自忠) 기타 29군 최고수뇌부는 8일 밤 진덕순 씨 집에서 집합 철소대책(徹宵對策)을 협의 중인데 사건 발생 부대의 소속 장관인 빙 씨는 극히 강경 의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뇌부의 의견은 여기에 끌리는 모양이어서 중국 측의 태도는 예상 이상으로 앞으로 사건 해결이 용이치 못하다고 보인다.

기사 원문

매일신보 호외 1937년 7월 20일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북지 사태 드디어 폭발점에아(我) 주둔군 자위권 발동

19일 밤 중대 성명 발표

[천진 19일발 동맹] 지나 주둔군은 은인(隱忍)각주4) 의 산을 내려가 마침내 자위권 발동의 결의를 하는 부득이한 국면에 봉착한 까닭에 19일 밤 중대 성명을 발표하고 군사령부는 비상한 긴장 속에 싸였다.

주둔군 중대 성명 내용
[천진 19일밤 동맹] 지나 주둔군 사령부는 19일 오후 10시 다음과 같은 중대성명을 발표하였다.

본 19일까지의 상황을 보건대 지나군은 노구교 및 그 부근에서 □□척후(斥候)각주5) 등으로써 우리 부대의 직전에 나아가 사격을 하고 19일 오후 5시경에 마침내 우리에게 부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또 노구교 부근에서 해당 지역의 보안대는 우리에 대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또 영정하 서안에 있는 지나군과 연락하여 오히려 이제 왕성히 진지를 구축 중이다. 그 사이에 처하여 일본군은 은인자중(隱忍自重), 이제 한 발도 응사(應射)치 아니하고 충실히 협정을 이행하였다. 그러한데 지나 측의 행동은 앞에서와 같이 분명히 협정에 위반할 뿐 아니라 일본군으로서는 자위상 침묵키 어려운 바이다. 따라서 지나군이 전과 다름없이 이처럼 불신행위를 반복하여서는 군은 20일 이후 독자의 행동을 취하는 부득이함에 이르렀다.

일전(一戰)도 불사한 장개석의 성명
[남경 19일발 동맹] 장개석은 19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장한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은 주권을 절대로 희생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주권 보전을 위하여는 일전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터인즉 전쟁이 개시되면 오래갈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남경 19일발 동맹] 장개석은 19일 노산(盧山) 담화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구강(九江)으로부터 비행기로 남경에 가서 오후 8시 남경과 상해에서도 동시에 발표하였는데 사태 발생 이래 장개석으로는 최후의 성명이다.

1. 중국은 영토 보전과 주권을 침해하는 해결안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2. 기찰(冀察)의 지위는 중앙의 결정하는 바로서 이에 비합법의 변개(變改)각주6) 를 가함을 불허한다. 3. 기찰위원장과 같은 중앙이 임명한 관리를 압박에 의하여 구속함에는 동의할 수 없다. 4. 제29군의 현 주지(駐地)에 제한을 가함을 불허한다.

해설

1932년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이후에도 호시탐탐 대륙 침략을 노렸다. 대공황으로 궁지에 몰린 일본의 독점자본주의를 위한 돌파구가 되리란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1936년에는 독일 · 이탈리아와 이른바 ‘방공(防共)협정’을 맺은 뒤 침략의 손길은 더욱 노골화됐다.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우(盧溝橋) 부근에서 양국 군대가 충돌한 것을 빌미로 일본군은 전면적인 중국 공격에 나섰다. 베이징에 이어 그해 12월 난징(南京)을 점령한 뒤 시민 30만 명을 학살하는 ‘난징 학살 사건’을 저질렀다.

이 전쟁으로 파시즘 체제가 강화되며 조선도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辭)’ 암송이나 천황에 대한 충성 표시로 일본 왕궁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강요한 것도 이때부터다. 또 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와 한문독본 중 순한문 과정을 9월부터 폐지하고 신문에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 쓰기 시작했다.

국외에서도 변화가 있었으니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 중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손잡고 정보 수집 · 후방 교란 등의 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한 것도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일전쟁에 나서기 위한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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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했고, 기자생활을 하며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을 마쳤다. 1983년 기자생활을 시작, 한국일보, 중앙경제, 중앙일보, 동아일보사 등에서 일했다. 중앙일보사 문화..펼쳐보기

출처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 저자김성희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신문 기사를 통해 우리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더듬어 보았으며, 우리 근현대사가 오늘날 살아 숨 쉬는 사건으로 되살아나도록 구성, 편집, 해설을 하였다. 최초의 근대 신..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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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일전쟁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김성희,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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