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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발행 | 제국신문(1905년 12월 01일, 1905년 12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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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閔氏) 진충(盡忠)
시종무관장 민영환 씨 등이 평리원에 대죄하다가 분간방송각주1) 하라신 처분이 내리신지라 일반 진신사서각주2) 와 백목전도가각주3) 에 회동하여 대죄하기를 공의각주4) 할 사이 민영환 씨는 명동 이완식 씨 집에 사처각주5) 하였더니 본일 상오 6시 량에 칼을 들고 목을 찔러 세상을 이별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더라.
순절(殉節) 상보(祥報)
민보국 영환 씨가 그저께 별목전도가에서 밤에 잠깐 그 본집에 다녀서 집안사람을 다보고 또 교동 그 계씨각주6) 집에 가서 그 대부인각주7) 을 보았고 종로로 다시 나가는데 집사람들이 조용한 곳에 계시기를 청하여 이완식 씨 집 건넌방에 사처하였더니 모시고 있는 청식이더러 어서 소청각주8) 으로 나가야 하겠으니 나가 세숫물을 데우라 하여 내보낸 후에 조용한 틈을 타서 주머니의 양도각주9) 를 가지고 목을 좌우편으로 찔러 인후가 끊어졌다더라.
즉시 그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갔더니 장안 수많은 관민이며 각 학교 학원들이 구름같이 모여 통곡하고 조상하는 자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었다더라.
기사 원문
조공(趙公) 유서(遺書)
순절한 원로대신 조병세씨가 음약자처각주10) 하실 때에 유서를 써 두었는데 각 공사에게 공함각주11) 한 전문은 이와 같다.
병세가 향일각주12) 에 일본사신이 조약을 겁박한 일로써 첨위각주13) 각하에게 공포하였으나 마침내 일차 회판함각주14) 을 얻지 못하매 우분한 마음이 탱중각주15) 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갚나니 복원각주16) 귀 공사는 이웃나라의 정의를 생각하고 약소한 나라를 긍측히각주17) 여겨 공동협의한 후 우리 독립의 권리를 회복케 한즉 병세가 마땅히 결초보은할 터이라 정신이 현란하고 기운이 촉급하여각주18) 이를 바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고
또 전국 인민에게 영결로 고한 전문을 번역하건대
병세가 죽기에 임하여 국내 인민에게 경고하오니 오호라, 강한 이웃나라가 맹약을 바꾸고 적신들이 나라를 팔아 500년 종사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고 2000만 생령각주19) 이 장차 노예를 면치 못하리. 나라가 망하여 오늘의 이 같은 수욕각주20) 을 어찌 참아보리오. 이는 진실로 지인열사의 피 흘리고 눈물 뿌릴 때라.
병세가 충분소격(忠憤所激)각주21) 에 힘을 헤아리지 않고 글장을 봉하여각주22) 궐문에 부르짖으며 궐문 밖에 석고 대죄하여 장차 이미 옮겨간 국권을 회복하여 생명을 위태한 가운데 구원하고자 하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아니하고 대세가 이미 간지라 오직 한 번 죽음으로써 위로 국가에 갚고 아래로 중인에게 사례하나 죽어도 여한이 있는 자는 나라의 형세를 회복치 못하고 인군각주23) 의 위태함을 풀지 못함이니 오직 우리 전국 동포는 나의 죽음으로써 슬프다 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더욱 충의를 힘써 국가를 보전하며 우리 독립 기초를 굳게 하여서 회계의 부끄럼(會稽之恥)을 신설하면각주24) 병세가 비록 구천지하에서라도 기쁘게 춤을 출 터이니 그 각각 힘쓰고 힘쓰라 하였다더라.
해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10여 년 전 좌의정까지 지내고 사임했던 원로 대신 조병세는 각각 소두(疏頭,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어 대궐에 들어가 수일간 연좌하면서 조약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
계속 조약 무효 상소를 올리던 민영환은 11월 30일 자결했다. 그 때 나이 마흔네 살. 명성황후의 조카로 20대에 지금의 장관인 판서를 지낸 그는 특명전권공사로 미국과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개명된 관료’였다. 외교권을 잃는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죽어도 죽지 않고 도울 것을 기약하노니 동포들은 천 배 만 배 더욱 분발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몰랐던 것은 지금 보면 안타까울 정도다. 유서 외에도 미국인 친지들에게 “···귀하가 거중조정(제3자가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끼여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일)을 행사하고, 우리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귀하가 아량 있는 노력을 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란 편지를 남긴 점이 그렇다. 미국은 을사늑약 직후인 11월 24일 가장 먼저 조선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침몰하는 배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쥐떼처럼’(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 공사관을 철수했으니 고종이나 민영환의 ‘미국 짝사랑’은 부질없는 기대였다. 역사를 오늘의 잣대로 재량해서는 안 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편 일본군에 끌려 나와 강제 추방되어 경기도 가평의 자택에 연금됐던 조병세가 이튿날 자결하는 등 민영환의 죽음은 큰 파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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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사를 통해 우리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더듬어 보았으며, 우리 근현대사가 오늘날 살아 숨 쉬는 사건으로 되살아나도록 구성, 편집, 해설을 하였다. 최초의 근대 신..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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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민영환 · 조병세 자결 –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김성희,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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