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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유럽 신화
여행

거인의 신부가 토르

평온했던 아스가르드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토르의 궁전이 어수선해졌다. 토르가 잠에서 막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온 집안을 맹렬하게 헤집어놓고 있었다. 수염이 헝클어지고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선 모습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토르의 부인 시프도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토르에게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원인은 토르의 망치 묠니르였다. 토르가 분명히 전날 머리맡에 두었던 망치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침 내내 망치를 발견하지 못한 토르는 그제야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감히 자기의 침실에 들어와 묠니르를 가져갈 만큼 간 큰 녀석이 있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을 겪은 토르의 머리카락은 오싹함에 순간적으로 쭈뼛 곤두섰다.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가서 냉큼 로키를 불러오너라! 그 녀석이 지금 뭘 하고 있던지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혼쭐이 날 거라고 전해!”

토르는 다급하게 로키를 찾았다. 묠니르는 서리 거인들로부터 아스가르드를 지켜주는 최후의 무기다. 그걸 아는 신들이 묠니르를 훔쳤을 리가 없고, 이런 짓을 할 만한 자가 아스가르드에 있다면 로키뿐이다. 설사 로키가 망치를 훔치지 않았더라도 꾀돌이 로키가 무슨 수를 내줄 것이라는 게 토르의 생각이었다.

“이봐 토르, 무슨 일이 있나? 왜 아침부터 바쁜 사람을 부르는 건가? 해가 중천에 있는데 벌써부터 술이나 퍼먹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미드가르드로 여행이라고 가고 싶어진 거야?”

토르는 로키를 쏘아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묠니르가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고. 설마 네놈이 가져간 건 아니겠지?”

로키는 펄쩍 뛰었다. 천하의 장난꾸러기에게도 놀라운 일인 듯했다.

“뭐가 없어졌다고? 그건 네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건데 그게 어떻게 없어졌다는 거야? 이봐, 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평소에 장난을 좀 치긴 하지만 목이 떨어질 일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묠니르를 훔치다 걸리면 목이 문제가 아니라 몸뚱이가 가루가 된다는 걸 내가 모르겠나? 이번 일은 절대 모르는 일이라고!”

로키가 극구 부인하자 토르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럼 대체 누가 훔쳐간 거지? 헤임달이 비프뢰스트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도 누가 아스가르드로 침입해 들어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가. 비프뢰스트 말고도 아스가르드에 들어오는 길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범인을 잡고 망치를 찾아오는 게 급선무다. 로키, 자네는 아스가르드에서 제일가는 꾀돌이잖나!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 거야?”

로키는 이번 일이 서리 거인들 중 하나의 짓일 거라는 걸 직감했다. 토르는 평소 인간들을 보살폈고 난쟁이들에게도 잘 대해줬기 때문에 그에게 이렇게 적대감을 직접적으로 표출할 만한 종족은 거인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거인들의 짓인 것 같아. 요툰헤임을 뒤져봐야겠어.”

“그 넓은 거인들의 땅을?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내 능력만으론 힘들고, 마법의 힘을 좀 빌려야겠지. 아스가르드에서 제일 마법 솜씨가 좋은 프레이야를 찾아가보자고.”

이렇게 둘은 폴크방에 있는 프레이야의 궁전인 세스룸니르를 찾아갔다. 토르는 로키와 함께 프레이야 앞으로 나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프레이야. 묠니르가 없어진 게 얼마나 큰일인지 당신도 잘 알거요. 로키가 그걸 찾아보겠다고 하니, 매로 변신해 하늘을 날 수 있는 깃옷을 그에게 좀 빌려주지 않겠소?”

프레이야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한눈에 알아챘다. 묠니르가 없어졌다는 걸 거인들이 알게 되면, 그들이 아스가르드로 쳐들어와 신들의 궁전을 무너뜨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녀는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 옷이 금이나 은으로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빌려드릴 테니 어서 가지고 가세요.”

로키는 매로 변신해 전속력으로 요툰헤임으로 날아갔다. 그는 요툰헤임의 하늘을 배회하다 서리 거인의 왕 ‘트림(Thrym)’을 발견했다. 그는 언덕 위에서 금줄을 목에 건 개들을 거느린 채 말갈기에 빗질을 하고 있었다. 로키는 트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트림이 로키를 먼저 보고 말을 걸었다.

“여, 이것 보시게. 아제 신들과 형제 사이인 거인 로키 아니신가. 그곳 소식 좀 전해주게. 요새 신들은 다 안녕한가? 요정들도 다 멀쩡히 지내는지 궁금하구먼!”

겉으로는 그냥 빙글거리는 투였지만 속엔 ‘잘 지낼 턱이 없을 텐데’라는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걸 눈치 챈 로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들도 안녕하지 못하고, 요정들도 죽을 맛일 겁니다. 토르의 묠니르가 감쪽같이 없어졌거든요.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혹시 당신이 망치를 감춘 것인지요.”

트림은 박장대소하며 대답했다.

“역시 로키는 눈치가 빠르군. 그래 맞아. 내가 묠니르를 토르의 손아귀에서 빼냈지. 여덟 길 아래 깊은 땅속에 감춰놓아서 나 말고는 아무도 찾지 못할 거야. 혹시 아제 신들이 망치를 되찾고 싶거들랑, 프레이야를 나에게 보내라고 하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그녀가 나에게 시집온다면 묠니르를 다시 내주겠어. 그 외의 조건은 없다. 알겠지? 꼭 그렇게 전하라고.”

로키는 ‘그게 될 것 같으냐’란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잠자코 다시 아스가르드를 향해 날아올랐다. 어차피 망치의 행방을 찾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리고 설사 망치를 뺏겠다고 힘으로 달려든다 해도 로키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트림이 아니었다. 그때, 아제 신들은 이미 우르드의 샘 곁에 모여 있었다. 로키가 어떤 소식을 가져오던지 이번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망치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런 실마리가 없어 그저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토르가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로키를 발견했다. 그가 착륙하려 하자 토르는 로키의 신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급하게 물었다.

“뭐라도 알아 가지고 온 건가? 내려오기 전에 그냥 거기서 말을 해보라고. 내 망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로키는 깃옷을 접어 들고 알아온 것을 신들에게 전했다.

“거인의 왕 트림이 망치를 가져갔습니다. 프레이야를 자기 신부로 내놓지 않으면 묠니르를 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프레이야를 주지 않고 다시 묠니르를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랍니다.”

아제 신들은 충격에 빠졌다. 거인 중에 몰래 묠니르를 훔쳐낼 만큼 출중한 자가 있다는 데 한 번 놀랐고, 그가 감히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프레이야를 달라고 한다는 데 두 번 놀랐다. 트림의 요구 조건이 너무 엄청난 것이었기에 신들은 로키가 돌아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꿀먹은 벙어리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슬쩍 입을 열었다.

“망치를 돌려주는 대신 프레이야를 달라는 트림의 말은 분명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오. 하지만 그 망치가 없으면 아스가르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오. 그러니 어쩌겠소? 안타깝지만 프레이야가 트림에게 가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죠?”

유리를 깨버릴 것 같이 날카로운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우르드의 샘가에 울려퍼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나를 저 트림에게 팔아서 망치를 되찾겠다고요? 내가 남자라면 아무에게나 달려드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프레이야의 하얀 피부는 말하는 동안 점차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얗던 얼굴이 너무나 시뻘개져서 얼굴에서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녀가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씩씩거리는 바람에 목에 걸려 있던 브리징아멘까지 풀려서 땅에 떨어졌다. 신들은 프레이야의 노기에 움찔해 자라마냥 목을 집어넣었다. 오딘만큼 루네 마법에 정통한 프레이야의 심기를 거슬러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한참 후에 지혜로운 헤임달이 묘안을 생각해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에게도 일정 부분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눈을 뻔히 뜨고 있을 때 거인이 토르의 궁전까지 침입했다는 건 아스가르드의 수문장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트림이 원하는 게 아름다운 프레이야라면 그렇게 해줍시다. 하지만 진짜로는 프레이야를 보내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신들의 커진 눈은 일제히 헤임달에게로 모아졌다. 그는 천천히 설명해나갔다.

“묠니르를 되찾아와야 하는데, 어차피 그건 토르만 제대로 다룰 수 있소. 그럼 토르를 프레이야로 변장시켜서 트림에게로 보내는 거요. 신부가 입는 옷을 입히고 보석으로 장식한 다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베일을 씌워서 요툰헤임으로 보내면 트림도 진짜 프레이야라고 생각할 겁니다.”

심각한 신들의 회의 자리에 갑자기 웃음 폭탄이 터졌다. 저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토르를 신부로 치장하다니! 기발하고 대담하면서도 참으로 유쾌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부로 변장해야 하는 토르는 죽을 맛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볼멘소리를 했다.

“망치는 분명히 찾아와야 하오. 하지만 베일이라니, 내가 그걸 쓰면 모든 사람이 나를 사내답지 못하다고 비웃지 않겠소? 다른 방법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지만 곁에 앉아 있던 로키는 토르와 생각이 정반대였다. 장난기 가득한 해결책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앞장서서 토르를 설득했다.

“토르, 그런 말 말라구. 고민만 거듭하는 사이에 거인들이 아스가르드로 쳐들어오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러지 말고 그냥 눈 딱 감고 이번만 신부 차림을 하라고.”

1902년, Elmer Boyd Smith의 작품

토르가 묠니르를 되찾아오기 위해 신부로 분장하고 있다.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스가르드는 난데없는 신부 꾸미기로 부산스러워졌다. 트림이 우락부락한 토르를 프레이야라고 믿게 해야 하는 만큼 진짜 결혼식 때보다 더욱 정성스럽고 세심하게 일을 진행해야 했다. 신부 화장이 끝나자 토르가 다시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달린 흰 드레스는 토르의 발치에서 나풀거렸고, 가슴에는 여자가 다는 보석이 번쩍거렸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긴 블라우스는 터질 것 같은 어깨근육을 겨우 감싸주고 있었고, 머리 위엔 미처 얼굴을 가리지 못한 흰 베일이 높이 솟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프레이야가 자신의 목에서 브리징아멘을 풀어 토르의 목에 걸어줬다. 요툰헤임으로 팔려갈 뻔했던 그녀도 토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터지는 걸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몰골이 아무리 우스꽝스럽다 해도 토르가 맡은 건 묠니르를 되찾아오는 막중한 임무였다. 그래서 오딘은 토르가 요툰헤임으로 떠나기 직전, 신들을 대표해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오딘도 아들이 여장한 모습을 생전 처음 보는지라,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커, 커험. 내 아들 토르여, 계략이 성공할 만큼 치장이 잘 이루어졌도다. 부디 트림을 속여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고, 망치를 찾아 돌아오길 바라노라.”

로키는 이미 수레에다 토르의 염소를 매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도 가려고?”

“내가 망치도 없는 토르를 어찌 저 험한 요툰헤임으로 혼자 보내겠나. 자네가 신부면 내가 시녀 역할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둘이 같이 트림을 만나러 감세나.”

로키의 당찬 대답에 토르는 감동했다. 하지만 장난기가 넘치는 로키는 신부 치장을 한 토르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끝까지 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토르의 수레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빙글거리는 로키와, 풀죽어 있는 건장한 신부를 태우고 트림이 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수레가 지나는 곳마다 암벽이 갈라지고 번개가 번쩍였다.

프레이야가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 트림도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어서어서 프레이야를 맞을 준비를 마치지 못하겠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뇨르드의 딸이 이리로 오고 있는데, 궁전 꼴이 이래서는 안 돼.”

한참 동안 하인들을 닦달하던 트림은 어느새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외양간은 금으로 된 뿔이 달린 소와 건장한 검은 소로 차 있다. 그뿐인가, 궁 안에는 온갖 보석이며 장신구가 가득하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 프레이야는 아직 갖지 못하였구나. 오늘이 바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가진 자가 되는 날이로다.’

프레이야. 1882년, Carl Emil Doepler의 작품

그녀는 미모 때문에 항상 거인들이 탐을 내는 대상이다.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스가르드에서 온 신부 일행이 도착하자 트림의 궁전에선 큰 잔치가 열렸다. 건장한 신부와 시녀는 잔치 자리로 안내받았다. 얼굴을 가린 두꺼운 베일 덕에 신부의 얼굴에 난 무성한 붉은 수염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궁 안에 들어선 뒤부터 신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터라 질그릇이 깨지는 것 같은 거칠고 굵은 목소리를 들은 자도 없었다. 거인들은 목에 브리징아멘을 건 신부가 틀림없이 프레이야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잔칫상엔 하늘에서 나는 것과 땅에서 나는 것, 바다에서 나는 것이 골고루 차려져 있었다. 꿀술도 넘칠 만큼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트림은 자신의 부인이 될 여인에게 배불리 먹을 것을 권했다.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던 토르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저 트림이란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라는 생각이었다. 아직 망치를 되찾지 못한 토르는 분을 먼저 음식에다 풀었다. 그는 소 한 마리와 송어 여덟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우고 술도 세 단지나 비워버렸다. 원래부터 대식가인 그였지만 끓어오르는 화가 그의 식욕을 더욱 자극한 탓이었다. 신부의 엄청난 식성에 트림은 놀라서 말했다.

“신부가 저렇게 많이 먹는 걸 누가 본 적이 있는가. 도저히 여인이 먹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데.”

토르 곁에 앉아 있던 로키가 냉큼 대답했다.

“프레이야 님은 거인들의 왕국에 올 기대 때문에 지난 아흐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로키의 말을 믿은 트림은 이번엔 신부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베일을 들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베일 안에서 본 것은 술기운과 분노로 붉어진 화등잔만 한 눈이었다. 트림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신부의 눈이 왜 저렇게 무서운 거지? 저렇게 이글거리는 눈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로키가 응수했다.

“프레이야 님은 트림 님과 결혼할 생각에 지난 아흐레 동안 한잠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오늘 첫날밤을 치르시면 나아질 겁니다.”

그때, 트림의 여동생이 잔치가 벌어지는 홀로 들어와 당돌하게 지참금을 요구했다.

“당신, 나에게 잘 보이고 싶지요? 그럼 그 손가락에 낀 빨간 반지들을 나에게 주는 게 어때요? 그럼 나도 당신을 아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샛말로 하면 시누이가 예단을 달라고 한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눈독을 들인 것이 최고급 명품 백에 버금가는, 아제 신들이 준비한 반지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누이가 예단에 시비를 거는 건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지름길이다. 게다가 탐내는 대상이 신부의 예물이라니. 이제나저제나 상을 뒤엎을 기회만 보는 토르에겐 트림의 여동생이 더욱 밉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트림이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외쳤다.

“신부의 망치를 어서 이리 가져오너라! 신부의 무릎에 묠니르를 올려놓으면 결혼의 신이 우리를 축복해줄 거다. 우리 둘의 합방은 바로 다음 순서다.”

하인들이 묠니르를 무릎에 올려놓자마자 토르의 흥분은 극에 달아올랐다. 그는 단박에 뒤집어썼던 베일을 벗어던지고 천둥을 몰고 다니며 거인들을 때려잡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토르는 묠니르를 단단히 쥐고 상하좌우를 가릴 것 없이 사방으로 휘둘러댔다.

“꽥!”

신부가 무시무시한 천둥신으로 변한 모습에 허둥대던 트림이 제일 먼저 망치에 맞았다. 그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건방지게 신부의 예물을 탐한 예비 시누이도 무사하지 못하고 두개골이 부스러져버렸다. 탐냈던 반지 대신 망치의 일격을 얻은 불행한 운명이었다. 잔치에 모인 거인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토르는 치마도 벗지 않은 채 망치를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거인들을 족족 쓰러트렸다. 이렇게 해서 트림의 궁전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했고, 토르와 아스가르드는 묠니르를 되찾았다.

〈트림의 노래(Thrymskvida)〉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운문 에다》에 실린 많은 시 중에서도 특별히 유머가 넘친다. 건장하고 힘이 넘치는 토르가 신부로 변장한 걸 생각하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도 몇 가지 북유럽의 결혼 관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고대 북유럽 사람들 사이엔 신랑이 신부에게 망치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부가 됐다는 걸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도 오랫동안 신랑이 결혼식에 도끼를 가져가는 풍습이 유지되었는데, 이것 역시 부부 생활의 번성을 바라는 것이었다. 또, 독일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 천둥이 치면 신부에게 행운이 깃든다고 믿었다. 이것 역시 게르만족 사회에서 유지되었던 토르 숭배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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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최순욱 집필자 소개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전자신문과 매일경제신문에서 약 6년 간 IT 분야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인터넷에 관한 몇 가지 진실과 오해》 《훤히 보이는 신재생에너지》(공저) 등이..펼쳐보기

출처

북유럽 신화 여행
북유럽 신화 여행 | 저자최순욱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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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거인의 신부가 된 토르북유럽 신화 여행, 최순욱,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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