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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유럽 신화
여행

헤임달의 신분 만들기

헤임달(Heimdallr)은 아스가르드의 파수꾼이다. 그의 임무는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잇는 무지개다리인 비프뢰스트를 지키는 것이다. 그의 궁전인 히민뵤르그(Himinbjqrg, 하늘의 파수꾼)도 누가 다리를 건너오나 감시하기 좋도록 비프뢰스트 바로 옆에 지어져 있다. 헤임달이라는 이름엔 ‘세계를 비추는 빛’이나 ‘신들의 빛’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도 그의 임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파수꾼이 된 것은 몇 가지 특출난 능력 때문이다. 헤임달은 그 누구보다도 눈이 좋아 밤이건 낮이건 아무리 먼 데서 일어난 일이라도 볼 수 있다. 풀이 자라는 소리와 양털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밝을 뿐더러, 잠도 새처럼 적게 자기 때문에 눈과 귀가 쉬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아홉 세상을 다 뒤져도 헤임달보다 무엇인가를 지키는 임무에 더 안성맞춤인 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헤임달은 용감하고 지혜로웠으며, 심지어 어느 정도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능력은 예언이라기보단 어렴풋한 예지에 가까운 것이어서 발라나 우르드 자매만큼 정확하게 닥쳐올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오딘은 그의 이러저러한 능력을 충분히 고려해 비프뢰스트의 감시자라는 중책을 맡겼을 것이다.

헤임달도 여느 신들처럼 그를 상징하는 보물을 몇 개 가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뿔나팔 걀라르(Gjallar)다. 헤임달은 라그나뢰크가 시작될 때 누구보다도 빨리 그 징조를 알아채고 이 나팔을 불게 된다. 걀라르의 울음을 들으면 오딘은 준비하고 있던 에인헤르자르를 모조리 최후의 전장으로 내보낼 것이다.

그런데 헤임달은 이렇게 중요한 걀라르를 몸에 지니고 있거나 자신의 거처에 보관하지 않는다. 그는 이 뿔나팔을 요툰헤임에 있는 미미르의 샘에 넣어두었다. 미미르는 신들의 전쟁 이후 바나헤임으로 갔다가 동행한 침묵의 신 회니르 덕에 목이 잘리는 지혜로운 거인이다. 미미르는 그의 몸이 멀쩡했을 때, 이 뿔나팔로 지혜의 샘물을 길어 마셨다. 헤임달도 미미르처럼 걀라르로 지혜의 샘물을 떠먹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8세기 아이슬란드 필사본에 그려진 헤임달

뿔나팔 걀라르는 그의 상징이다.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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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갈기를 가진 말 굴토프(Gulltopp)도 그가 자랑하는 보물이다. 그는 비프뢰스트를 지킬 때면 항상 옆구리에 칼을 찬 채 이 말 위에 높이 올라앉는다. 그럴 때면 온통 황금으로 된 그의 이가 햇빛과 무지갯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금으로 된 이도 보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붙어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스가르드의 침입자를 감시하는 헤임달은 아제 신들과 종말을 함께할 운명이다. 하지만 혈통을 따지면 그는 완전한 신족은 아니다. 헤임달은 오딘과 아홉 파도(걀프, 그레이프, 에이스틀라, 에이르갸바, 울브룬, 안게이야, 이므드, 아틀라, 아른작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홉 파도는 바다 거인 에기르(Ægir)와 그 아내 란(Rán)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는 있지만 어머니가 아홉이나 된다니, 어떤 연유인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원래 그런 모양이군’ 하고 넘기는 수밖에. 우리는 헤임달이 반은 신이요, 반은 거인이면서 충실하게 오딘과 아스가르드에 봉사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어찌 된 영문인지 헤임달은 로키와 앙숙이었다. 반은 거인의 핏줄인 자신이 보통의 아제 신들보다 로키와 훨씬 가까운 존재였을 텐데도 말이다. 로키가 처음 아스가르드로 왔을 때 헤임달이 오딘에게 노골적으로 그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진언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는 헤임달이 예지력으로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좋지 않은 일을 몰고 올 것이라는 걸 내다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키와 헤임달이 프레이야의 목걸이를 두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우리가 앞전에 보았던 브리징아멘 이야기의 다른 판본인데, 여기선 헤임달이 로키가 프레이야의 침실에서 브리징아멘을 훔쳤다는 걸 알아낸다. 헤임달은 도망가는 로키를 추격했고, 둘은 바다표범으로까지 변신해 격투를 벌인다. 이 싸움에서 로키를 제압한 헤임달은 브리징아멘을 되찾아 프레이야에게 돌려준다.

이런 이유로 여러 문헌에선 헤임달을 ‘로키의 적’이라거나 ‘프레이야의 목걸이를 되찾아준 자’로 부르는 경우가 꽤 많다. 원수지간인 둘은 라그나뢰크에서도 맞붙게 될 것이다. 헤임달은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뵐루스파(예언녀의 계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용히 들으시오
고귀하신 분들이여
헤임달 신족의
높고 낮은 자손이여,
천부의 위업을
전파하려 하노니,
내가 아는 태고의
오랜 전설이니라.

〈뵐루스파〉를 보거나 듣는 모든 인간이 헤임달의 자손이라는 말인데, 이건 오딘 삼형제가 나무에서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것과 충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헤임달이 인간 사회의 계급, 즉 신분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말로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직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헤임달은 리그르(Rigr)라는 이름으로 미드가르드를 여행한 적이 있다. 헤임달, 아니 리그르는 오랜 항해 끝에 어느 바닷가에 닿았다. 그는 거기서부터 난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리그르는 한 오두막을 발견했다. 움막이라고 불러도 크게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다. 리그르는 이 집에서 요기와 잠자리를 해결할 요량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아이(Ai, 증조할아버지)와 에다(Edda, 증조할머니)라고 하는 꼬부랑 부부가 난롯가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누구요?”

아이가 물었다.

“나는 리그르라고 하오. 날이 저물어가니 이 집에서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수 있겠소?”

아이와 에다는 리그르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고, 셋은 곧 웃고 이야기하며 어울렸다. 리그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기에 곧 노부부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리그르는 불 앞 의자에서 가장 좋은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와 에다는 리그르의 양 옆에 나뉘어 앉았다.

셋 다 배가 고파지자 에다는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 속에서 꺼낸, 겨 껍질이 잔뜩 붙은 치즈 덩어리를 검은 빵과 함께 식탁에 차려냈다. 치즈나 빵 모두 씹으면 입안에서 버걱거릴 정도로 딱딱했지만 그나마 이걸 불려 먹을 수 있는 뜨끈한 송아지고깃국이 있어 다행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리그르에겐 이것만으로도 요기를 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최고의 식사라고 할 만한 음식은 분명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셋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에도 제일 좋은 자리는 리그르의 차지였다. 그는 딱딱한 침대 한가운데에 누웠고 그 양쪽으로 노부부가 누웠다. 리그르는 이런 식으로 아이와 에다의 집에서 사흘 밤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리그르는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을 대접해준 노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리그르가 사라진 지 아홉 달이 흘렀다. 어느새 에다의 배가 불러왔고 결국 그녀는 피부가 검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노부부는 아이 이름을 트랄(Trall, 하인)이라고 지었다. 트랄은 없는 살림에도 거침없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외양은 썩 보기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검은 얼굴은 험상궂었고, 손발은 마디마다 관절이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등도 굽은 데다 손도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트랄은 힘이 좋았다. 머리가 커지면서 그는 힘을 일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트랄은 장작을 패고, 밭을 일구었으며, 여행하는 사람들의 짐을 대신 날라주기도 했다. 트랄이 젊은이가 되었을 때 그의 집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거뭇한 피부에 다리가 굽었고 발에는 종기가 잔뜩 나 있었으며, 코는 납작하게 눌린 여인이었다. 트랄만큼이나 외모가 훌륭하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은 티르(Tyrir, 하녀)였다.

트랄과 티르는 첫눈에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방에서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재잘거렸다. 밤이 되자 트랄과 티르는 같은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부터 둘은 부부가 됐다. 두 사람은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런데 트랄과 티르의 아들딸은 하나같이 몸만 쓰며 일하다가 가끔씩 술주정으로 소란을 피우는 무지렁이뿐이었다. 그들은 평생 동안 밭을 갈고 돼지나 염소를 기르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대를 이은 자식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머슴과 농노 종족이 태어난 것이다.

한편, 아이와 에다의 집을 떠난 리그르는 또 한참을 걸었다. 며칠 후 저녁, 리그르는 문이 반쯤 열린 집에 도착했다. 성이나 궁전엔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비바람이나 짐승이 덮칠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번듯한 곳이었다. 이 집에도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과 부인의 이름은 각각 아피(Afi, 할아버지)와 암마(Amma, 할머니)라고 했다. 리그르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난롯가 앞에서 아피는 나무를 깎아 천을 짜는 베틀을 만들고 있었고, 암마는 바느질에 열심이었다. 이마가 훤한 아피는 수염을 말끔하게 손질한 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다. 고운 치마를 입은 암마는 두건을 쓰고 목도리와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둘 다 이전에 만난 아이나 에다보다는 훨씬 형편이 좋아 보였다.

“나는 리그르라고 하오. 날이 저물어가니 이 집에서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수 있겠소?”

리그르는 이번에도 집주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베풀어달라고 말했고, 곧 주인의 허락을 얻어냈다. 아피와 암마의 집에서 벌어진 일도 아이와 에다의 집에서 벌어진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셋은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눴고, 이번에도 부부를 즐겁게 해준 리그르가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다만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이전과 좀 달랐다. 암마는 갈색 빵과 부드러운 버터를 꺼내 따뜻한 송아지 고기가 들어 있는 냄비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벌꿀술도 있었다. 셋은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이전에 대접받았던 것보다 훨씬 좋은 음식은 리그르의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식사를 마친 셋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에도 셋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가운데가 리그르였고 왼쪽이 아피, 오른쪽이 암마였다. 리그르는 사흘 동안 부부의 대접을 받은 뒤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아홉 달이 지난 뒤 암마도 사내아이를 낳았다. 부부는 볼이 불그스름하고 두 눈이 반짝이는 아이를 포대기로 감싼 뒤 칼(Karl, 농부 · 장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칼도 무럭무럭 자라 체격 좋고 건장한 청년이 됐다. 칼은 힘도 셌지만 특히 손재주가 좋았다. 그는 가축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거니와 쟁기를 만드는 법, 그리고 쟁기를 써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방법도 터득했다. 튼튼한 집과 짐승 우리를 지을 줄도 알았고, 먼 곳을 갈 수 있는 마차를 만들 수도 있었다.

칼은 자기와 썩 잘 어울리는 배필을 만나 결혼했다. 스뇌르(Snör, 이어주는 끈)라고 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처녀는 결혼할 때 염소 가죽으로 된 외투를 입고 왔다. 허리춤에는 곳간이나 부엌, 광을 단단히 단속할 수 있는 열쇠들이 쩔그렁거리고 있었다. 두 부부는 칼이 직접 지은 집에, 역시 칼이 직접 만든 침대를 놓고 지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들도 많은 자식을 낳았는데, 아들 대부분은 전사나 지주, 자유민, 장인 등의 직업을 갖게 됐다. 딸은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배필이 됐다. 칼과 스뇌르의 자손 중엔 국왕의 시종이 되거나 큰 농장을 경영하게 된 자도 있었다. 이들로부터 자유민, 자유농민이 유래했다.

아피와 암마의 집을 떠난 뒤에도 리그르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리그르는 한 궁궐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리그르는 거칠 것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궐이다 보니 집이 꽤 컸다. 복도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바닥이 널찍한 홀이 나왔다. 홀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둘은 부부였는데, 이름이 각각 파티르(Fathir, 아버지)와 모티르(Mothir, 어머니)였다.

둘은 처음엔 리그르가 홀에 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다. 파티르는 활과 시위, 화살을 만들고 다듬는 데 여념이 없었고, 모티르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파티르도 풍채가 훌륭했지만 특히 모티르는 에다나 암마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눈썹은 빛났고, 흰 피부는 살짝 드러난 그녀의 앞가슴과 목덜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베일과 장신구, 파란 드레스 같은 옷가지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매우 잘 어울렸다. 리그르가 가까이 다가서자 부부는 그제야 낯선 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리그르는 이번에도 주인의 호의를 기대했다.

“나는 리그르라고 하오. 밖은 날이 저물어가는데, 내가 이곳에서 요깃거리와 잠자리를 얻을 수 있겠소?”

이번에도 주인 부부는 리그르에게 선행을 베푸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재미난 말로 부부를 즐겁게 해준 리그르는 이번에도 파티르와 모티르를 사이에 두고 의자 한가운데에 앉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모티르는 꽃무늬가 수놓인 호화로운 천을 식탁에 깔고 그 위에 갓 구워낸 하얀 빵을 푸짐하게 올려놓았다. 햄이나 새, 다른 짐승의 고기도 고급스런 은그릇에 담겨 있었고, 심지어는 손님이 피로를 풀 수 있게 도와줄 포도주까지 나와 있었다. 셋은 담소를 나누며 만찬을 즐겼다. 리그르가 여행 중에 맛본 최고의 식사였다.

밤이 깊어지자 셋은 잠자리에 들었다. 리그르는 좋은 말로 부부를 달래 침대 가운데에 누웠다. 리그르를 사이에 두고 부부는 잠을 청했다. 이렇게 사흘 밤을 보낸 뒤, 리그르는 파티르와 모티르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홉 달이 지나 모티르도 아이를 낳았다. 뺨과 눈이 빛나는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파티르와 모티르는 아이에게 얄(Jarl, 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비단으로 감싸 애지중지 키웠다.

얄은 자라면서 특히 무술에 장기를 보였다. 창, 칼, 활 등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고, 방패를 휘둘러 자신을 지키는 법에도 통달했다. 아버지처럼 자기가 쓸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 수도 있었다. 사냥할 때 사냥개를 원하는 곳으로 모는 법도 잘 알았고, 좁은 해협 정도는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수영 실력도 출중했다. 얄이 청년이 되자 리그르가 그를 찾아왔다. 같은 자식인데도 리그르는 트랄이나 칼에겐 별 관심도, 만나볼 생각도 없었다. 그는 얄에게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 밝히고 마법의 루네 문자를 가르쳤으며, 넓은 땅과 그를 따르는 군사도 줬다.

얄은 이를 발판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얄은 큰 궁전에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도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줘서 신망도 두터웠다. 그는 에르나(Erna)란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을 배필로 삼아 오래오래 살며 많은 자손을 얻었다. 왕과 귀족계급은 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리그스말(Rigsmál, 리그르의 노래)〉이라는 시로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사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원래 얄과 엠마의 자식 중 가장 능력이 출중한 막내아들 코누르(Konr)의 모험 이야기가 뒤에 더 있는 것 같은데, 문헌이 소실된 관계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없어진 코누르의 이야기가 아쉽긴 하나, 그래도 이 이야기를 통해 리그르, 그러니까 헤임달이 왜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길지 않은 이 이야기는 기록 당시인 13세기 무렵 북유럽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엔 귀족, 자유민, 노예의 세 계급으로 구분된 신분제도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교류는 하더라도 서로 다른 거주지를 이뤄 살았을 것이다. 또, 옷매무새만 고치고 있는 모티르를 통해 여성 중 농노와 자유민에 속한 자만이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엔 나그네나 여행자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베푸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인구 이동이 잦지 않았던 무렵, 여행자는 외부의 여러 소식을 가장 잘 전달해주는 창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임달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주인 부부를 즐겁게 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신화의 ‘역할’ 또는 ‘기능’이다. 어떤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신화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그것이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설명, 그러니까 그 상황을 정당화하는 답을 구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화는 증명이 불가능한 ‘신’과 ‘신의 뜻’이라는 말로 이런 문제에 아주 명쾌하게 대답해준다.

고대 북유럽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는 귀족으로 태어나 놀면서도 잘 먹고 잘사는데, 왜 나는 농노로 태어나 뼈 빠지게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걸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때 돌아오는, “리그르로 변장한 헤임달이 원래 그렇게 갈라놓은 거야”라는 대답은, 이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거역할 수 없는 신이 세상의 질서를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한낱 인간이 뭘 어쩌겠는가. 그저 잠자코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렇게 신화는 인간 세상의 이치를 신의 권능이나 뜻과 연결함으로써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의 신화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오랜 시간 동안 읽히고 구전될수록 힘이 더욱 커져서 종국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상황에 대한 의문조차 품지 않게 한다. 즉, 신화는 그 신화가 읽히는 사회의 관습이나 구조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신화학자인 롤랑 바르트가 “신화는 사실적 체계로 읽히지만 실은 기호학적 체계”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의미다. 기호학적 체계는 쉽게 말하면 드러난 대상에 어떤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 구조를 말한다. 헤임달이 신분을 만들어낸 이야기는 당시의 신분 체계를 공고히 하려는 의지가 담긴 기호학적 체계다.

반면, 사실적 체계는 인과관계로 이뤄진, 명백한 논리가 적용되는 현실 세계의 구조를 말한다. 바르트의 말에는 ‘신화는 내포된 의미를 감춘 채, 그 자체가 사실인 것처럼 위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대개 신화를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알고 넘어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이야기가 의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약간은 초점이 다르지만, 대부분의 신이 바람둥이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신화의 기능과 관계가 있다. 신들은 대개 한 명의 배우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느 지역의 신화건 간에, 뭇 신이 기혼자와 미혼자를 가리지 않고 정을 통해 자식을 낳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이런 예로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가 대표적이다. 제우스는 헤라라는 멀쩡한 조강지처를 두고서도 그리스 신화를 통틀어 열 정도의 신과 넷 정도의 요정, 일곱 정도 되는 인간과 정을 통했다. 심지어는 동성애 성향까지 있었는지 어린 사내를 좋아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우스는 서른 정도 되는 신과 열 명 정도 되는 인간 자식을 두었다. 오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딘에게도 아름다운 처 프리그가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거인, 요정, 인간과 사랑을 나눴다. 자식도 당연히 많다. 뭇 신의 아버지요 왕인 이들은 대체 왜 채신머리없이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제우스나 오딘이 원래 바람둥이였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바람둥이로 만든 것이다. 이들이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들, 특히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출중한 영웅이다. 제우스와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라스가 그랬고, 포세이돈과 아에게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테세우스가 그랬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 영웅인 시구르드(Sigurd)도 혈통을 따져보면 오딘의 자손이다.

많은 경우 이런 영웅은 실제 현실에서 새로운 왕가나 나라를 세운다. 영웅 본인이 하지 않을 땐 자손이 과업을 대신 수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신의 혈통으로 얻은 힘이나 지혜, 또는 여기에 버금가는 출중한 능력으로 많은 적을 격퇴하거나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린다. 그리스, 북유럽 같은 서양 신화에서뿐만 아니라 동양 신화에서도 이런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 영웅은 대개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신의 자손이 국가를 건설하고 왕가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건설하고 왕가를 이룩한 영웅이 신의 자손임을 내세웠다고 보는 게 맞다. 그 옛날엔 적에게 겁을 주고 지지자에게 능력을 과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DNA 검사를 할 수도 없고 제대로 된 족보나 호적도 없었던 시기에 누군가가 “내가 신의 자손이다”라고 하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아 그런가요”라고 할 수밖에.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신의 힘을 빌려 이야기가 스스로 정당성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이 어느 왕가나 나라를 신의 후손이 세운 것이라고 믿게 되는 건 바로 이때부터다. 이런 걸 바라고 이놈저놈 다 신의 혈통을 끌어다 쓰면 어떻게 되겠나. 이렇게 해서 신들은 채신머리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바람둥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신들의 바람기로까지 번졌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에는 오딘의 부인 프리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결혼과 정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프리그는 오딘의 멈추지 않는 바람기 때문에 늘 애를 태운다. 그럼에도 그녀는 현숙한 부인의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오딘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프리그는 오딘의 행동 때문에 마음고생을 단단히 하게 된다. 다만, 그 원인은 바람기가 아닌 오딘의 괴팍한 성격에 있다. 게다가 그녀의 입지는 ‘오딘의 부인’이라는 간판에 걸맞지 않게 프레이야에게 밀리는 판이다. 그런고로 바로 지금이 존재감이 약한 프레이르와 헤임달에 이어 프리그에 대해 알아볼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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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산문 에다》중 〈Husdrapa〉, http://www.heimskringla.no/wiki/H%C3%BAsdr%C3%A1pa 참조.
  • ・ 임한순 · 최윤영 · 김길웅 옮김, 《에다-게르만 민족의 신화, 영웅전설, 생활의 지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p5.
  • ・ 롤랑 바르트,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 옮김, 《현대의 신화》, 동문선, 1997, p297.

최순욱 집필자 소개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전자신문과 매일경제신문에서 약 6년 간 IT 분야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인터넷에 관한 몇 가지 진실과 오해》 《훤히 보이는 신재생에너지》(공저) 등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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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여행
북유럽 신화 여행 | 저자최순욱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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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헤임달의 신분 만들기북유럽 신화 여행, 최순욱,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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