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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예종
고려 16대왕, 睿宗목차
접기문치의 왕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북방의 야인을 크게 응징했던 예종은 문종 33년(1079)에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이다.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이며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하고 시 짓기에 능했다. 성격 또한 침착하고 도량도 넓었던 예종은 1105년 숙종이 사망하자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예종은 헌종의 묘호를 제정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조정 개편에 나섰다. 위계정을 문하시중, 최홍사와 이오를 문하시랑평장사, 윤관을 중서시랑평장사, 임의를 상서좌복야 등에 각각 임명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다음 숙종의 측근 관료인 윤관을 중용, 부왕의 유지대로 대규모 여진 정벌을 단행하였다.
즉위 초의 의욕적인 정치 운영에도 불구하고 동북 9성의 반환과 함께 측근인 윤관마저 실각하자 숙종의 유지를 계승하려는 예종의 정국 운영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단 변방의 안정이라는 성과를 일궈낸 예종은 내치로 눈을 돌렸다.
여진 정벌이라는 대규모의 정벌 사업에 정력을 기울인 탓으로 예종은 자칫 무치(武治)에 힘쓴 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문치(文治)에 더 힘쓴 왕이었다. 변방의 안정에 온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꾸준히 문화 정책과 민심안정책을 벌여나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예종은 학문으로 국운을 일으키려 했다. 예종 4년(1109) 9성을 여진 측에 반환하였을 무렵, 국학에 7재(齋)를 두게 되었는데 이는 학문으로써 국운을 일으키려 한 예종의 뜻이 반영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종대 이후로 사학이 흥성한데다 사학에 집착하는 사류들의 반대로 예상만큼의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예종은 국학을 다시 일으키려 애쓴 한편, 예종 11년(1116)에는 청연각과 보문각을 따로 두어 문학과 학문을 더욱 진흥시켰다. 청연각과 보문각은 ‘선비를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선정의 근본이다.’라고 생각한 예종의 집념이 담긴 산실이었다.
예종은 청연각과 보문각 두 곳의 학사들에게 다 같이 저술을 명하되 청연각 학사들에게는 강론에 전념하게 하고 보문각 학사들에게는 시부를 비롯한 창작에 전념하도록 했다. 지금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것이 청연각이라면 보문각은 예술원에 해당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목표는 순수했지만, 청연각과 보문각의 설치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를 조장하여 무신난을 초래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예종은 불교보다는 유교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고려 왕 가운데 특이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예종은 민심안정책으로 각 지방에 감무(監務)를 파견하여 유망민들을 안정시켰다.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고 빈민들의 갖가지 질병을 돌보기 위해 혜민국도 설치했다. 요순 시대의 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감옥을 비우기도 했으며,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여 유교적 예의 원칙을 정착시키는 노력도 기울였다.
예종의 탐미적 취향
예종은 즉위와 동시에 여진을 정벌하고 고려 어떤 왕보다도 문치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편으로 중국풍을 좇으며 호종단과 같은 송나라 귀화인을 신임하여 그의 말에 현혹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게다가 척신 이자겸의 둘째 딸(순덕왕후 이씨, 인종의 모후)을 왕비로 맞이하여 이자겸 및 그의 아들들에게 높은 관작을 내려주는 등 인주 이씨가 크게 발호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예종은 어려서부터 풍류를 좋아하여 자주 신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부왕 숙종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도 주연을 즐길 정도였다. 탐미적인 취향 또한 대단하여 궁궐의 남쪽과 서쪽에 화원을 만들었다. 이때 환관들이 서로 다투어 장원을 늘이며 민간의 화초를 빼앗아다 화원에 옮겨 심는 폐단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만족 못한 예종은 송나라 상인들로부터 거금을 주어 화초를 사들이기도 했는데 마침내 이러한 일들이 구설수에 오르자 화원들을 다 없애기도 했다.
예종은 음악과 춤을 몹시 좋아하여 송나라로부터 아악(雅樂, 궁중음악)의 시초가 된 대성악을 전해 받아 궁중에서 연주하게 하기도 했으며 춤 솜씨 좋은 기녀들에게 자주 상을 내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예종은 기녀 영롱과 갈운이 노래와 춤을 잘한다 하여 이들에게 자주 상을 내렸다. 입바른 선비 고효충이 〈감이녀시(感二女詩)〉라는 시를 지어 왕의 행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바른 소리한 죄로 고효충은 결국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과거에 합격, 등용되기도 했으니 예종은 나름대로 격이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왕이었다.
국외 | 시대 |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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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 예종 즉위 | |
1106 |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행함 | |
송, 휘종 원체화 융성기 주도 | 1107 | 윤관, 여진 격파. 6성 축조 |
1108 | 윤관, 함경도 북부에 9성 축조 | |
영국, 스콜라 철학자 안셀무스 죽음 | 1109 | 9성 여진에게 돌려줌, 구제도감 (救濟都監) 설치 |
1110 | 제술·명경 등 제업의 과거 과목을 정함 | |
1111 | 전주·전호의 전수분급율 정함 | |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착공 | 1112 | 혜민국 설치 |
1113 | 예의상정소 설치 | |
여진족, 금 건국 | 1115 | 삼사, 녹의 절계법(折計法) 개정 |
금 태조, 여진문자 창제케 함 | 1119 | 양현고 설치 |
1120 | 예종, 팔관회에서 〈도이장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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