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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어느 후보에게 투표하시겠습까?" 2012년 4·11 총선거를 앞두고 내가 받은 전화다. 아마도 내 기억에 "지금 바쁩니다!" 하고 냉큼 끊어버린 듯하다. 그런데 선거철 각종 설문조사에 성실하게 끝까지 답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정치권을 뒤흔드는 변수, 여론조사

민심의 향배를 가늠해보는 데 여론조사만 한 게 없다 보니, 각 정당들은 후보 공천 단계부터 여론조사를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판에서까지 여론조사가 결정적 한방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판을 뒤흔든 이 장면 기억하는가. 심야의 포장마차 러브샷.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약속한다. 결과는 46.8 대 42.2로, 4.6퍼센트포인트라는 근소한 차로 대선 티켓을 거머쥔 노무현 후보는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후 여론조사는 대통령 선거에서도 결정적이었다. 민심이 당심을 눌렀다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는 현장 선거인단 투표에서 박근혜 후보에 뒤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당 후보로 선출됐고 결국 청와대행을 확정 지었다.

여론조사는 이젠 선거에서 결정적인 잣대가 되었지만 이를 맹신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선거철은 여론조사 기관에게 대목이다. 정당이나 언론사의 의뢰로 크게는 수천만 원짜리 여론조사가 실시된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사마다 여론조사 결과가 달라 적게는 1퍼센트포인트 많게는 10퍼센트포인트 이상 큰 격차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1, 2위 후보가 여론조사 기관별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시기, 규모, 또 조사할 때 집전화와 휴대전화를 함께 조사했는지 여부에 따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응답률인데, 보통 적게는 5퍼센트에서 많아봤자 10퍼센트대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집전화만 조사했을 경우 2~30대의 의견이 누락될 수 있다. 게다가 여론조사 설문 문항을 어떻게 작성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천차만별이다. 다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으로 돌아가보자. 이명박 후보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누구를 선호하느냐"의 선호도 방식을, 박근혜 후보는 "내일 투표를 한다면 누구를 지지하겠느냐"고 지지도 방식을 주장했다. 신경전 끝에 선호도 방식으로 합의했는데, 결과는 이명박 후보의 승리였다.

여론조사, 조작도 가능하다?

여론조사가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결과가 당락을 가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군가는 여론조사에 목숨을 걸고 조작까지 감행하기도 한다. 19대 국회의원을 뽑는 2012년 4·11 총선거가 끝난 직후, 여론조사 기관에서 근무하는 실무자가 한 언론에 제보한 내용이 화제가 됐다. 이 제보자는 "여론조사 결과를 의도적으로 조작해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 가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지지도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는데 조직력을 앞세워 여론조사 결과를 유리하게 만들어 배포한 뒤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실무자는 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여론조사 기관도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집단이므로 돈을 지급하는 의뢰인 측의 입맛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여론조사 결과에 원하지 않는 설문은 반영하지 않고, 원하는 것만 반영시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수치화하는 식이다. 또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왔을 때는 척도 스케일을 바꿔 눈을 현혹시키는 방법도 있다. 100점 만점에 70점과 5점 만점에 3.5점은 받아들이는 데 엄청난 온도 차가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미리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의뢰인과 협상할 때 설문지를 유리하게 만드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보통 보기를 줄 때 가나다순으로 나열하지만 의뢰인을 유리한 1번으로 하여 상대 비교에서 우선순위를 준다. 또 의뢰인에게 유리한 보기를 우선순위에 배치하고 가중치를 높인다고 폭로했다.

전화 조사도 조작이 손쉽다고 한다. 일반적인 여론조사는 KT전화번호부에 올라와 있는 집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골라 전화를 걸어 실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집전화 등재 가구가 5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다 걸려온 ARS전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재미있는 것은 KT등재 방식만을 사용했을 때는 보수층들의 응답률이 높았다. 집 전화번호를 대상으로 하루 종일 여론조사가 진행되다 보니 응답하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나 노인들이 대부분. 즉 응답자 성향이 보수성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2010년 지방선거부터는 RDD(random digit dialing)방식을 적용했지만 결번이 많아 응답률이 20퍼센트도 안 된다. 또한 받더라도 스팸 광고의 홍수 속에 귀찮은 듯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최근에는 휴대전화를 대상으로 조사원들이 전화 면접 조사를 직접 실시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믿게 되는 여론조사

이쯤 되면 여론조사는 민심의 바로미터가 아니라 민심의 '미꾸라지'라 불릴 만한데, 사안의 파급력에 비하면 제재가 너무 솜방망이다. 여론조사 기관이 조사결과를 3~6개월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사가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녹음도 100퍼센트하는 것이 아니라 30퍼센트만 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 반응이다.

정치권 또한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오차를 포함한 추정치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지율 1퍼센트 차이에 울고 웃는다. 여론조사 결과가 유권자의 판단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판세를 읽어가는 중요한 잣대로 자리매김한 이상 미덥지는 않지만 영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결과 자체의 영향력보다 그것이 언론을 통해 공표되면서 갖게 되는 영향력이 더 막대하다. 나 또한 기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유권자이기에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정치화하는 데 나도 모르게 현혹되고 있다. 여론조사란 흐름을 보는 것이고, 상황의 스냅사진에 불과한데도 여론조사 결과만을 발표하는 경마식 보도에 익숙해져 있다.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조차 궁금해진다.

현행 공직선거법에서는 선거 6일 전부터 언론사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일 하루 전까지 여론조사를 공표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제시하면서 논란이 뜨겁다. 선관위가 내세운 이유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발달로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에도 출처가 불분명한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대거 유포되는 등 문제점이 나타나기 때문에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내용의 법률 개정안은 민주당 배재정 의원 대표 발의로 이미 국회에도 제출되어 있다. 개정안은 응답률 20퍼센트 미만의 선거 여론조사는 공표·보도를 금지하고 여론조사 공표·보도 시 응답률을 포함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개정이 현실화된다면 선거 전날까지 쏟아지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속에서 소신 있게 표를 던지는 것은 결국 유권자의 몫이 된다. 아직 누굴 뽑을 것인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A 후보 지지율이 더 높다더라' 하는 정보는 귀가 솔깃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상대 후보의 지지율이 더 높게 나타나면 '남들은 A 후보를 선호하는구나. B 후보 지지자는 나밖에 없는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묘한 군중심리에 휩쓸리게 된다. '대세가 A 후보라는데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 보구나' 하고 믿게 되는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여론의 힘

여론조사 자체는 조사 방법의 허점과 그 신뢰성 문제 등으로 믿거나 말거나 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이란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유권자의 표가 필요할 때 권력은 마지못해 여론을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지만, 사정이 바뀌면 태도를 바꾸기 일쑤라고 현 정치 행태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또 국민의 목소리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귀를 닫는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여론이 비전문적이고 비효율적이며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론을 멀리하는 권력에게 국민은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국민은 여론을 거스르며 독선과 아집으로 밀어붙이는 권력으로부터 냉정하게 돌아설 것이다.

로마시대에 여론은 '백성의 소리'로 인식됐고 서양의 절대주의 시대에도 '인민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고 했다. 민심은 곧 천심(天心)으로 받아들여져 과거 조선시대 왕들은 밤거리를 잠행하기도 했다. 율곡 선생이 '공론'이라 일컬은 것도 현대적 의미의 여론이었다. 율곡 이이는 '백성이 다 같이 옳다고 하는 것'이 여론이라 했다. 여론이란 '세상 일이 지향해주기를 바라는 방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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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집필자 소개

강원도 동해에서 자랐고, 강릉원주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한국정책방송을 거쳐 2007년 국회방송에 입사해 새누리당, 민주당 등을 출입하고 주요 상임위원회를 취재했다. 지은 책으..펼쳐보기

출처

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 저자양윤선, 이소영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365일 국회 안에서 숨 쉬어온 국회 기자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국회, 정치의 모든 것을 담았다. 알고 보면 정치도 재미있는 것, 언론을 통해서만 접하는 정치를 좀 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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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여론조사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양윤선, 이소영,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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