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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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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제

다른 표기 언어 金亨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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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년 1월 23일, 충청남도 부여(夫餘)
사망 1945년 12월 23일
주요활동 1920년 중국 길림군정부에 보낼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포상훈격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888년 1월 23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규암면(窺岩面) 합송리(合松里)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군자금 모집활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부터 김영진(金瑛鎭)을 필두로 조병채(趙炳彩) 등이 중국 지린(吉林)에 있는 군정부(吉林軍政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에게 보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1920년 (음)11월 초 노재철(盧載喆)을 찾아가서, “김영진(金瑛鎭)이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특파원으로서 조선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나 동지자가 없어 곤란하다”고 말하고, 노재철에게 김영진과 함께 행동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같은 시기 이창호(李昌鎬)가 찾아와서 김영진의 권총 1정을 숨겨주기를 부탁하자 수락하였고, 이듬해인 1921년 (음)1월 4일 김영진이 와서 권총을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맡아 두었다. 이후 충청남도의 부호(富豪)들을 찾아가 군자금 모집에 협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활동을 함께 하였다.

일본 경찰이 비밀결사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추적해오자 이를 피해 활동을 이어가다가, 거창(居昌)에서 조병채(趙炳彩) ・ 노재철(盧載喆)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22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으로 징역 9월을 받았다.

김형제 재판 보도 기사(『매일신보』 19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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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3일 김상배(金相培) ・ 조영구(趙榮九) 등과 함께 부여군 규암면(窺岩面) 합송리(合松里)에 농민학원을 열고, 원감과 교직원을 맡아 무보수로 수업을 하였다. 이후 행적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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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판결문(김영진 외 8인)」,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1922. 9. 18
  • ・ 「수형인명부」, 공주지방법원, 1922. 4. 19
  • ・ 『동아일보』, 1921. 3. 31, 1922. 5. 18, 1927. 5. 3
  • ・ 『매일신보』, 1921. 3. 31, 7. 27, 1922. 7. 6, 1922. 9. 7
  • ・ 『조선일보』, 1921. 3. 31, 1927. 5. 1, 1927.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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