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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12월 8일, 제주(濟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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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6년 7월 2일 |
주요활동 | 1941년 11월경 비밀결사 우리들 조직 |
포상훈격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
관련 인물/단체 | 우리들 |
1917년 12월 8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조천면(朝天面) 신촌리(新村里)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1932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숙부집에 기거하며 시모노세키시(下關市)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다녔으나, 가정불화로 5학년에 중퇴하였다. 여관 급사나 신문배달부 일을 하다가, 1936년 2월경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갔다.
신문배달부, 경시청 고원(雇員) 등을 전전하면서 사립 목백상업학교(目白商業學校)를 거쳐 릿쇼대학(立正大學) 고등사범부(高等師範部)에 입학하였다. 1941년 12월 학교를 중퇴하고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숙부와 함께 화신상회(和信商會)라는 무역상을 경영하였다.
도쿄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인의 한인에 대한 민족 차별을 직접 보면서 점차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40년 3월에는 동아연맹(東亞聯盟) 관계자 최은환(崔殷桓) ・ 강영석(姜永錫) 등과 알게 되면서 동아연맹에 출입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지도하에 학생 좌담회에도 관여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적 감정을 자극받았고, 일제의 한국 통치의 기본 방침이 한민족 말살에 있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1940년 11월 동아연맹 학생 좌담회에서 알게 된 홍영기(洪英基) ・ 박석우(朴錫祐) 등과 함께 조선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협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홍영기 ・ 박석우 등 3인의 동지들과 함께 민족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비밀결사 ‘우리들’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쿄제국대학 식물원에서 회합을 갖고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1단계 조처로 학생의 처지임을 감안하여 각자 전문분야에서 민족 지도 원리의 연구에 노력하기로 하였는데, 역사 분야를 맡았다.
1941년 8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전남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창평리(昌平里)의 박석우 집에서 다시 회합을 열고 그동안의 활동을 검토하면서 독립의식 앙양에 더욱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이와 같은 회합을 수차례 가지고, 1941년 12월 이후에는 분산 활동을 결의하고 만남을 이어가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10월 6일 야마구치(山口) 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방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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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판결문」, 야마구치지방재판소, 1944. 10. 6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 1978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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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창옥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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