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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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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화

다른 표기 언어 金鍾和 동의어 김청하, 金淸河, 김응호, 金應昊, 金鍾化, 金宗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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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년, 강원도 고성(固城)
사망 미상
주요활동 오호츠크 한인들의 대표로 독립운동자금 운송, 혈성단의 총무 겸 부단장으로 무장력 강화, 북간도 훈춘(琿春) 소재 신민단의 무기구입 지원
포상훈격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
관련 인물/단체 혈성단,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연해주한인총회)

강원도 고성군(固城郡) 이북면(二北面) 온천동(溫泉洞)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1922년 판결문에 34세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8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김청하(金淸河) ・ 김응호(金應昊) ・ 김종화(金鍾化) ・ (金宗化)가 있다.

어려서 부모, 양부모을 잃고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석왕사(釋王寺)에 들어가 1년간 한학을 공부하고 13세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니콜라예프스크니항(泥港)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3년간 한학을 배우며 15년을 지냈다. 그 후 오호츠크로 가서 2년 동안 금광에 종사하였다.

1922년 3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을 때 취조한 일본 관헌은 “상당한 한문 소양을 갖고 있는 러시아아통으로 언뜻 인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담력 있고 부동의 독립사상이 치열하여 회오의 기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1919년 1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전로한족중앙총회장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무선 전신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다. 오호츠크 거주 한인 약 3백 명은 3・1독립선언 이후 3,800원(円) 상당의 사금(砂金)과 1만 루블을 모금하였다. 이 독립자금 모집에는 신한촌에 근거를 둔 소년모험단(단장 김운학, 총무 홍파, 위원 박춘근 ・ 김봉기)의 노력이 컸다. 모은 독립자금 가운데는 오호츠크 지단 소속 금광노동자 120명이 모은 금 4푸드가 들어 있었다.

이후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 강국모(姜國模) ・ 우 파벨과 함께 상하이 연락파견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차에 1919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홍범도(洪範圖)와 김찬오(金讚旿) 두 사람이 강국모에게 통신한 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허다한 독립단이 있으므로 상당한 인물들을 동반하여 오라”는 것이었다.

같이 파견된 강국모 ・ 우 파벨 등과 함께 오호츠크 한인들이 모은 독립자금을 휴대하고, 1919년 11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이들 파견원의 블라디보스토크행에는 오호츠크 거주 한인 14명이 동행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 독립운동단체 인사의 권유를 받아 상하이행을 포기하였다.

1919년 12월 신한촌 거주 주홍익(朱鴻益)과 소총 70정과 폭탄 여러 개를 구입하여, 마차로 1920년 2월까지 신한촌 대안, 즉 아무르만 서편에 위치한 모아산(帽兒山) 산중에 운반하여 은닉해 두었다. 어느 정도 무장력을 갖추게 되자 강국모는 수이푼(秋風) 지방의 다부하(多富河)로 가서 김청남(金淸嵐)과 함께 독립군 조직에 착수하였다. 강국모는 대한제국시절 북청진위대 정교(正校), 김청남은 대한제국 진위대 정위(正尉)를 지낸 구한국군 장교 출신었다.

마침내 1920년 (음)1월 강국모 ・ 김종호 ・ 김청남은 오호츠크로부터 함께 동행한 14명에 더하여 수이푼지역 한인촌락 재피거우에서 남만주 서간도로부터 그로데고보에 와 있던 독립단원 80명을 기본으로 삼아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였다. 혈성단의 부단장에 선출되었는데, 단장은 강국모, 참모장은 김청남이었다.

당시 독립단원들은 독립단 부단장인 최영호(崔永浩)가 그로데고보에서 지방 토호(土豪)들의 음해로 러시아군에게 살해되어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였다. 이들 독립단원의 일부는 아무르주[흑룡주(黑龍州)]로 가고, 다른 일부는 그로데고보를 떠나 수이푼의 만석동(萬石洞)에 도피해 와 있었다. 1920년 3월 10일, 강국모와 더불어 모아산 산중에 은닉하여 두었던 무기를 운송하여 혈성단을 무장시켰다.

이어 추가 구입에 나서 주홍익과 함께 1920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 장교와 교섭하여 38식 권총 100정과 탄약 18만 1천 8백 발(120상자)을 1만 1천원에 매수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날 추르킨(Churkin) 반도 남단 우수리만까지 체코군 화물자동차로 운반케 하고, 이곳에서 다시 범선을 이용하여 신한촌 대안의 모아산으로 운송하였다. 산중에 은닉한 무기를 파수하느라 4일을 굶었다. 이때 절식한 탓으로 병을 얻어 오랫동안 신한촌에서 요양해야 하였다. 주홍익은 대금 결제를 위하여 신한촌으로 가는 도중에 도피하였다.

이후 북간도 훈춘(琿春)에 근거를 둔 신민단 간부 고상준(高尙俊)이 무기 구입차 블라디보스토크에 오자 앞서 구입해 둔 총 100정, 탄약 70상자를 1만 6백 원에 양도하였다. 나머지 탄약은 8월 7일 수이푼으로 운반하여 강국모에게 넘겨주었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일본군이 수이푼지역에 쇄도할 것이라는 풍설에 따라 강국모는 10월 하순 혈성단을 이끌고 아누치노(Anuchino, 현재의 아르세니예프) 동북방에 위치한 코로빈카(Korovinka) 마을로 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중대 규모로 편성되었던 혈성단의 간부 구성을 보면, 단장은 강국모(무기국장 겸임)이고, 지휘자(중대장)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군관학교 출신인 채영(蔡永), 참모장은 함흥 출신의 사회운동가 한일제(韓一濟), 재무장은 왕재호였다. 채영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북간도 독립군 총지휘자인 북로사령관에 임명한 상태였다.

혈성단 조직 관련 일제 측 보고(1920.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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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촌에서 요양중이던 1920년 12월 29일 코로빈카에 도착하고 혈성단에 합류하여 총무 겸 부단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혈성단 단원은 약 270명이었다. 혈성단은 1921년 3월 1일 코로빈카에서 성대한 독립기념식을 개최하였다. 한편, 혈성단 군대는 소자하(蘇子河) 흥두동(興頭洞)에 본부를 두었던 고려노농군회(高麗勞農軍會)와 통합하였다.

고려노농군회는 수청(水靑, Suchan) 지역 최초의 한인빨치산 군대인 한창걸(韓昌傑) 부대가 훈춘에서 이동해온 신민단의 부대와 통합된 부대로 ‘제1수청의병대’라고 불렸다. 이 고려노농군회가 수이푼에서 옮겨온 혈성단 부대와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수청지역의 통일고려인의병대를 창설한 것이다. 후일 이 통합된 군대를 앞서 조직된 고려노농군회(제1수청의병대)와 구별하여 ‘제2수청의병대’라고 하였다.

통합군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청 다우지미(大烏吉密)에 있는 김경천(金擎天)과 미주(美洲)로부터 온 저명한 민족운동가 정재관(鄭在寬)이 초청되었는데, 특히 김경천에게는 군무와 사관 양성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들은 수청지역 한인들을 기반으로 제2수청의병대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혁명조직으로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연해주한인총회)를 1921년 4월 27일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 간부는 총회장 강국모, 군무부장 겸 사령관 김경천, 고문 정재관, 재무부장 한일제, 민사부장 강석봉(姜石鳳, 강백우), 외교부장 한창걸, 교육부장 박경철, 선전부장 박성혁이었다.

제2수청의병대는 당시 소련 야코르니코프의 기병수비대와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대와 교전 때 상호 협력하기로 약정하였다. 군무부 안에 군대를 편성하여 3개 중대(각 3소대), 기병소대, 학도대, 적십자대를 두었다.

군대는 총사령관 김경천, 사령부관 김용준, 중대장으로 신용걸 ・ 이학운 ・ 허용하 등을 선임하였다. 트레치-푸진에 6개월 속성의 사관학교도 설립되었다. 사관학교의 교장은 김경천, 교관은 박경철 ・ 강백우 등이었으며, 학생 수는 42명이었다.

1921년 9월 러시아빨치산본부가 제2수청의병대에게 아누치노에 주둔 중인 러시아빨치산부대에 통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혈성단 단장 강국모는 수청의병대에서의 위상이 낮아지고, 러시아빨치산부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것을 싫어하던 차에 사령관 김경천과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국제공산당의 파견으로 수청지역에 당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손풍익을 오발로 살해하게 되었다. 이에 강국모는 혈성단을 분리하여 수청지역을 떠나 다시 본래의 본거지인 수이푼의 북(北)시베창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직후 1921년 10월 경의 혈성단 규모는 약 700명이었고, 이때 부단장을 맡았다. 다른 간부진은 단장 강국모, 재무차장 김태준(金泰俊), 사법부장 이윤(李倫), 사법차장 배영선(裵永善), 외교부장 윤백경(尹白京), 외교차장 김윤(金允), 학무부장 백성직(白星稷), 학무차장 최선(崔先), 참모부장 지우강(池兩降) 등이었다.

1922년 3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에 밀고에 의해 거소가 드러나 일본군 신한촌 헌병분견소에 붙잡혔다. 단장 강국모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와 김종화의 소재를 밀고한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에게 협박장을 보내는 등 구출하기 위해 애썼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일본헌병대의 심문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고, 북간도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연락하여 무장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할 것이라는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한편, 무기 구입 활동에서 열성적으로 활약하였던 동지 주홍익 역시 1년 전인 1921년 2월말 블라디보스토크 일본헌병대에 붙잡혔다. 3월 3일 포조 헌병분대로부터 청진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어 징역 2년을 받고 1922년 4월 당시 원산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1922년 4월 28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지만 1922년 7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6년 2개월 8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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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2. 6. 19
  • ・ 「판결문」, 고등법원, 1922. 7. 22
  • ・ 「刑事控訴事件簿」
  • ・ 「박청림이 이인섭에게 보낸 편지-혈성단의 연혁」, 1922. 3. 2
  • ・ 『매일신보』 1922. 5. 5
  • ・ 「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 1920. 1.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9』
  • ・ 「鮮人武裝團體와 馬賊의 衝突에 關한 報告書 送付件」, 1921. 3. 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1』
  • ・ 「血誠團副團長 金鍾和 取調狀況에 關한 件」, 1922. 4. 1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반병률, 『항일혁명가 최호림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한울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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