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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사 3 -
의식... 조선의 음식 문화
조선시대 다양한 부식 재료들
우리 민족은 주식인 밥과 더불어 국, 찌개, 김치, 나물, 생채, 조림, 구이, 젓갈, 마른반찬, 전, 회, 찜 등 다양한 부식을 마련해 먹었다. 부식의 재료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각종 채소류였다. 제철에 나는 채소들을 건조시키거나 김치로 가공해 오랫동안 저장해두고 먹었다. 이런 채소들은 각종 비타민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다양한 어패류를 젓갈과 건어물 등으로 가공해 먹었는데 이 또한 단백질을 보충해주는 부식이었다.
부식을 만드는 방법은 다양했다. 우선 국 · 찌개 · 조림 · 편육 · 찜 등의 습열식 조리 방법과 구이 등의 건열식 조리 방법을 들 수 있다. 여기에 튀각 · 전 · 부침과 같이 기름을 이용하는 방법, 쌈 · 회 등 날것을 그대로 먹는 방법, 무침 · 나물과 같이 데친 다음 양념으로 무치는 방법이 있다. 특히 김치 · 장 · 젓갈 등의 발효 · 가공식품은 단백질과 비타민을 사계절 내내 공급하는 중요한 부식이었다.
채소, 가장 대표적인 부식 재료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먹을 수 있는 풀을 모두 채(菜)라고 했다. 나물에는 재배 나물과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식용 풀들이 사용되었다. 냉이, 물망이, 비름, 산갓, 메꽃, 최초리, 고사리, 달래, 씀바귀, 돌나물, 물쑥나물, 버섯, 두릅, 더덕 등이 즐겨 사용되었다.
요즘도 채소류를 마련하기 위해 집 주변에 채마밭 가꾸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생활 방식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다. 고려 말의 명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는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가포지영(家圃之詠)’에서 뜰에서 자라는 여섯 종류의 채소와 그것으로 만든 음식에 대해 읊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있는 원(園), 후원(後園), 포(圃, 채소밭) 등에서 채소를 직접 경작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집 뒤편에 채마밭을 만들어 노비에게 경작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1551년 2월 18일) 또한 노비들의 몸값을 산채와 채소로 받기도 했다. 박주대각주1) 의 『저상일월(渚上日月)』에서도 후원과 집 밖에 채마밭을 만들고 파와 가지 등의 채소를 경작했다고 한다.(1836년 3월 10일, 1849년 7월 1일 등)
성현의 『용재총화』를 보면 채소를 자급자족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땅에 맞는 채소를 대규모로 경작해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에서는 무청 · 나복(蘿蔔, 무) · 백채(白菜, 배추)를, 청파와 노원에서는 토란을, 경기 삭녕에서는 총채(蔥菜, 파)를, 충청도에서는 마늘을, 전라도에서는 생강을 즐겨 심었다고 한다. 이런 재배 식물은 식단을 풍성하게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부식 재료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두부, 귀하고 특별한 음식
두부는 콩을 재료로 만든 대표적인 가공식품이다. 두부는 중국 송나라 시대에 일반 백성에게 알려졌고, 명나라 시대 이후의 기록에 주로 등장한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李穡)은 중국에서 두부를 처음 맛보고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채소국에 입맛을 잃은 지 오래된지라 두부를 저며 보니 기름진 비계처럼 새롭다. 치아가 드물어도 좋은 듯하니, 늙은 몸을 보양하는 데 좋겠다.
두부는 각종 잔치와 모임, 제사 때에 두루 사용되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육류 사용이 제한된 사찰에서 특히 많이 만들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영당(影堂)의 성격을 가진 안봉사(安峯寺)에 콩을 보내 두부를 만들어 오도록 했으며, 집안 제사와 행사 때 승려들이 두부를 제조해 빈객들을 접대했다고 기록되었다. 즉 제조 과정이 번거로워 사찰에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후 점차 제조법이 보편화되면서 일반 가정에서도 두부를 부식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두부의 재료로 쓰이는 콩의 가격이 비싸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수산물, 대표적인 단백질 공급원
수산물은 바닷물고기와 민물고기를 모두 식용으로 이용했으며, 단백질 식품으로 널리 활용했다. 우리나라 연해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고, 동해와 서해 · 남해에서는 수심 · 수온 · 염도 등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므로 수산물의 종류가 풍부했다. 따라서 수산물은 주요한 식량이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에는 수산업의 성장이 둔화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수산업이 장려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바닷물에 발을 친 뒤 어류를 거둬들이는 어량(魚粱)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 결과 수산업이 활발해졌고, 어량은 해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수산업이 발전해 어전 어업뿐만 아니라 어망 어업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이후 교환경제의 발달과 함께 어류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한편 거리의 제약과 보관시설의 미비로 어류를 건조시키거나, 염장 · 발효시킨 가공식품이 개발되었다. 가공 어류식품이 발달하면서 제철식품의 한계를 극복하고 1년 내내 단백질을 섭취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축산물과 가공식품, 귀한 먹거리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는 육식을 절제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고려 말에 원나라와 교류해 거란과 여진 사람에게 도축을 전담시키면서 육류의 섭취가 다소 증가했으나, 수조육류는 조선시대에도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
『도문대작』각주2) , 『증보산림경제』 등에 따르면, 가축인 소 · 돼지 · 개 · 염소 · 거위 · 오리와 사냥에서 얻은 꿩 · 토끼 · 매 · 사슴 · 노루 · 곰 · 표범 · 산돼지 등을 식용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소는 농사와 물자의 운반 등에 필요한 주된 노동력으로 함부로 도살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수시로 도우금지령(屠牛禁止令)을 내려 도살을 엄금했다. 일반적으로 소는 식용으로 사용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각종 연회에 빠지지 않는 고급 재료였다. 그런 이유로 식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죽은 소 또는 병든 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암일기』를 보면 실제로 죽은 소를 먹고 부작용으로 사람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573년 4월 4일) 소는 살로 된 부위는 물론이고 머리, 심장, 간, 위, 콩팥, 갈비, 앞뒤 다리, 선지 등 모든 부위를 식용으로 이용했다. 따라서 소의 부위별 조리법이 발달했고, 고유한 고기 요리 문화를 형성했다.
돼지와 닭 역시 새끼를 키우고 알을 낳아서 재화로 교환할 수 있었으므로 마음 놓고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인 돼지와 닭을 활용한 음식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이밖에 개를 주재료로 한 요리도 인기가 있었다. 개를 재료로 한 요리는 가장(家獐, 『묵재일기』), 가록(家鹿, 『미암일기』), 구장(狗醬, 『저상일월』)이라고 불렸다. 개고기는 가축류의 식용이 어려운 형편에서 귀한 여름철 건강식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가축보다 수렵으로 포획한 수조류를 식용으로 선호했다. 수조류의 부위별 조리법이 발달했으며, 육포로 가공해 오래 두고 먹기도 했다. 수렵으로 포획한 수조류로는 멧돼지 · 노루 · 사슴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사냥철인 11월부터 2월 사이에 활발하게 교환이 이루어졌다. 주로 멧돼지는 한 마리를 통째로 주고받거나 앞다리, 뒷다리, 살코기 등으로 분리해 주고받았다.
노루는 모든 계절에 고르게 유통되었는데, 생장(生獐)은 주로 11월부터 2월까지 교환되었다. 3월부터 10월까지는 건장(乾獐)이나 포가 주로 교환되었다. 사슴 역시 11월부터 1월까지만 생록(生鹿)이 유통되었으며, 그 외의 기간에는 대부분 포가 교환되었다. 가장 많은 양을 포획하고 교환했던 것은 역시 꿩이다. 꿩은 10월부터 2월까지 매우 활용도가 높은 육류였으며, 건치(乾雉)와 포(脯)의 형태로 저장 · 보관했다. 다양한 식품을 마련하기 어려운 겨울철에 포획한 수조류는 별미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친지와 동료들로부터 선물받은 다양한 축산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노루고기 포(獐脯) · 사슴고기 포(鹿脯) · 멧돼지고기 포(山猪脯) · 돼지고기 포(猪脯) · 쇠고기 육포(牛脯) 등이 있으며, 그냥 편포(片脯), 포육(脯肉), 포 등으로만 기록된 것도 많이 있다. 특히 유희춘은 지방관으로부터 부정기적이나마 1년 내내 많은 양의 건포를 제공받아서 제수와 식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유희춘처럼 수조육류를 쉽게 이용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고받은 숫자와 부위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특별히 기억할 만한 귀한 식품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부식 재료를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했으나 대개 두 가지 경로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자급자족할 여력이 없는 경우 시장에서 구매하거나 잉여 생산물로 교환했다. 『성종실록』에는 신숙주각주3) 가 전라도에서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장문(場門)이라는 향시(鄕市)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 5일장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16세기부터는 전국에 시장이 형성되어 직접 생산해서 마련할 수 없는 각종 생산물을 교환하거나 매매했다. 시장은, 점차 일반 백성이 기본 생활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상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다.
이문건은 많은 지인들로부터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제공받았지만 시장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장에서 수소를 암소로 바꾸거나 포백(布帛, 베와 비단), 유기(鍮器), 어물 등을 구입했다. 또한 오희문의 『쇄미록』을 보면 시장이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술과 떡을 내다 파는가 하면(1593년 8월 27일, 1594년 3월 11일 등), 곡물 · 혼수용 비단 · 우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구매했다. 특히 노비들에게 해안 지방의 시장에서 어물과 소금 등을 다량 구매하게 한 뒤, 내륙 지역의 시장에서 판매하는 등 시장을 이윤 추구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해안 지역의 수산물과 면화나 모시 등의 특산물이 산지를 중심으로 집결됨으로써 시장은 잉여 생산물의 교환과 이익 창출이란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부식 재료를 마련하는 두 번째 방법은, 향촌이나 친지들과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생활용품을 선물로 공급받는 것이었다. 양반은 노비와 자신의 세력 아래에 있는 인력을 동원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적인 교유 관계를 형성한 친지들끼리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선물의 종류는 곡물, 찬물(饌物), 주류(酒類), 약재를 비롯해 특산품과 기호품 등 매우 다양했다. 당시는 모든 식료품이 특정한 계절에만 생산되었으므로 보관 기간이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교환 방식이 더욱 필요했다.
양반 가정의 경우, 이윤 창출을 위한 교역 활동보다는 사적인 교환경제에 더 의존했으며, 지방관이 제공하는 특혜 물품들은 향촌 양반의 가정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회제도가 확립되면서 이런 사적인 관계는 점차 축소되었으며, 자가 생산과 시장경제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특수작물의 재배와 광작(廣作), 수공업의 잉여 생산 등은 향시와 시장 유통망을 활성화시켰고, 생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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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를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의미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생활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이를 구현했는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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