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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음식 문화

조선시대 밥과 반찬

상차림의 기본

우리나라의 강우량과 토양, 기온 등은 벼농사에 적당하다. 하지만 산지가 많기 때문에 보리, 기장, 조 등의 잡곡 농사가 발달했다. 자연스럽게 주식으로 쌀과 잡곡을 혼용했는데, 주식인 밥은 부식에 우선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각종 재료를 활용해 국, 찌개, 김치, 나물, 생채, 조림, 구이, 젓갈, 마른반찬, 전, 회, 찜 등의 부식을 마련했다.

전통 음식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많이 정비되었다. 균형 잡힌 영양을 제공하는 음식 조리법의 정리는 물론이고, 술 · 장 · 젓갈 · 김치 등 저장식품의 가공기술도 발달했다. 또한 사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별미 음식을 마련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적 정치 윤리가 확립되면서 유교 이념에 준하는 가례(家禮) 준칙을 따랐고, 가례 음식의 규범도 엄격해졌다. 특히 종중(宗中)이나 가문의 의미가 강화되면서 음식 문화도 가문의 품격을 반영하는 요인으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은 끼니를 해결하거나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 건국 시기부터 18세기 정조 때까지 400년 동안 가뭄 · 황충(蝗蟲) · 태풍 · 홍수해 등의 재해로 기근이 발생해 그 대책을 조정에서 논의한 횟수만 해도 152회에 달한다. 결국 약 2.5년마다 봄과 가을이 되면 백성은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다.

기근이 들면 길가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고, 연명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기꺼이 노비로 팔기도 했다. 살던 곳을 떠나 떠돌면서 아이들을 버리고 돌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런 형편에 밥과 부식을 곁들인 상차림이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다양한 부식은 고사하고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고대했다.

조선시대에 다양한 맛과 고운 빛깔을 겸비한 음식을 배불리 맛볼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 음식들은 분명 꿈에서나 누릴 수 있는 사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고급스런 음식의 맛과 모습을 전하고 상상했다. 판소리 『춘향전』은 상상 속에서 그리던 음식들을 한껏 차려냄으로써 듣는 이들에게 동경의 나래를 한껏 펼치게 했다.

춘향의 모(母)······향단아 주반(酒盤) 등대하였느냐. 예, 대답하고 주효(酒肴)를 차릴 적에 안주 등물을 볼작시면, 굄새도 정결하고 가리찜,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메추리 순탕에 울산의 대전복을 대모 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의 눈썹 채로 어슥비슥 오려놓고, 염통산적, 양볶음과 춘치자명 생치 다리, 적벽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률과 숙률, 잣송이며 호도, 대추, 석류, 유자, 준시, 앵두, 탕기 같은 청실리를 칫수 있게 되었다. 술병치레 볼작시면 티끌 없는 백옥병과 벽해수상 산호병과 엽락금정 오동병과 목 긴 황새병, 자라병, 당화병, 쇄금병, 소상 동정 죽절병 그 가운데 천은 알안자 적통자와 쇄금자를 차례로 놓았는데, 구비함도 갖을시고.

술 이름을 이를진대 이적선 포도주, 안기생 자하주, 산림처사 송엽주,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 펄펄 뛰는 화주,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를 골라내어 알안자를 가득 부어 청동화로 백탄 불에 남비 냉수 끓는 가운데 알안자 둘러 불한불열 데워내서 금잔, 옥잔, 앵무배를 그 가운데 데웠으니, 옥경연화 피는 꽃이 태을선녀 연엽주 띄듯, 대광보국 영의정 파초선 띄듯 둥덩실 띄워놓고 권주가 한 곡조에 일배일배 부일배라. 이 도령이 이른 말이, 금야에 하는 절차 보니 관청이 아니어든 어이 그리 구비한가. 춘향모 여짜오대, 사랑에 노는 손님 영웅호걸 문장들과 죽마고우 벗님네 주야로 즐기실 제, 내당의 하인 불러 밥상 술상 재촉할 제, 보고 배우지 못하고는 어이 곧 등대하리. 내자가 불민하면 가장 낯을 깎임이라 내 생전 힘써 가르쳐 아무쪼록 본받아 행하라고 돈 생기면 사모아 손으로 만들어서 눈에 익고 손에 익히려고 일시반때 놓지 않고 시킨 바라.······

평범한 민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상차림이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음식물 조달이 비교적 쉬운 관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음식들은 일반 민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으며, 이런 상차림은 주부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회혼례의 푸짐한 상차림

회혼례의 주인공인 노부부와 하객들 앞에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자손들이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고 있다. 《회혼례첩》 부분, 작자 미상,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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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반이나 관직자라고 해서 늘 넉넉하고 풍요로운 밥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품계가 높은 관원들에게는 공판점심(公辦點心)이라 해서 공관에서 마련한 점심을 지급했으나, 1573년(선조 6)부터는 당상관들에게만 지급했다. 하급 관원들은 각자 점심을 해결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시골에서 혼자 상경한 관원들은 점심을 굶는 일이 많았다.

유희춘도 혼자 상경해 벼슬살이를 했는데, 근무를 하는 날에는 관청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나 집에 있는 날에는 동료들이 가져다준 감태(甘苔, 김)와 황어(黃魚), 치어적(鯔魚灸), 저(菹) 등 한두 가지 반찬만으로 간소하게 끼니를 해결했다. 심지어는 반찬이 없어서 밥을 넘기지 못하다가 때마침 친지가 보내온 붕어를 끓여서 겨우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갔을 때에는 지방관들이 차려내는 푸짐한 연회상을 받았다. 『미암일기』를 보면 음식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연회에 대한 소감을 “매우 많이 차렸다”(1571년 8월 20일), “차린 음식이 풍성하기가 비길 바 없다”(1572년 9월 5일) 등으로 표현했다.

성주의 유력한 사족이었던 이문건은 지방관이나 중앙 관료가 참석한 연회와 향촌에서의 의례, 인근 사족의 생신이나 혼인 등 특별한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다. 이문건은 가무(歌舞)를 곁들인 화려한 상차림을 “환락(歡樂)”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만큼 만족스러웠음을 의미한다. 향촌의 유력한 사족인 이문건이나 고위 관료였던 유희춘에게도 지방관들이 차려내는 연회상의 음식들은 일상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때로 과일이나 잔치음식을 따로 싸서 가족들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관청이나 상류층 역시 특별한 목적과 사유가 있을 때에만 푸짐한 상차림을 마련했다. 상차림도 관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를 보면, 1787년 갑산진관(甲山鎭管)으로 부임한 노상추에게 하리(下吏)가 차려낸 음식은 한 병의 모주(牟酒)와 삶은 닭 한 마리가 전부였다. 지역 특성이나 세력에 따라 관청의 음식 문화에도 큰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787년 7월 17일)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양반층 내에서도 생활 격차가 벌어졌다. 『이재난고』각주1) 의 저자인 황윤석(黃胤錫)은 전라도 흥덕에 농경지를 소유한 18세기 향촌 사족이었다. 그는 매번 과거를 위해 상경하면서 소용되는 비용을 꼼꼼히 따졌다. 그는 특히 식비를 절약했는데, 식비로 하루 평균 5푼 정도를 사용했다. 길거리에서 인절미를 사먹거나 주막에서 국밥을 사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상경해서는 성균관의 열악한 식사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성균관에서 기숙하던 1759년 10월, 황윤석은 한열과 현기증으로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성균관을 떠나 몸조리를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약 대신 닭 한 마리를 고아서 3일 동안 먹었다고 한다. 음식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알려주는 일화이다. 지방 양반인 황윤석의 객지 생활은 그야말로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가난한 일반 백성의 식생활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배고픔에 익숙한 사람들이 늘 곁에 있는 현실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양반들이라 해도 검약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석으로 밥과 갱(羹, 국), 고기 하나, 채소 하나를 먹는 간소한 식생활을 전하고 있다.

다시 판소리 『춘향전』으로 돌아가보자. 서울에 올라간 이 도령은 장원급제해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왔으나, 춘향은 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늦은 밤 이몽룡은 찢어진 도포에 찌그러진 갓을 쓴 남루한 차림으로 춘향의 집을 찾아왔다.

춘향모 기가 차서, 양반이 그릇되매 간롱(奸弄)조차 들었구나. 어사 짐짓 춘향모의 하는 거동을 보랴 하고, 시장하여 나 죽겄네, 날밥 한술 주소. 춘향모 밥 달라는 말을 듣고 밥 없네. 어찌 밥이 없을꼬마는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이때 향단이 옥(獄)에 갔다 나오더니······애기씨가 알면 지레 야단이 날 것이니 너무 괄시 마옵소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먹던 밥에 풋고추 저리김치 양념 넣고 단간장에 냉수 가득 떠서 모반에 받쳐 드리면서······.

향단이가 급히 차려온 요기상은 양반 사위를 맞이하며 차려낸 상차림과는 대조적이다. 평소에 먹던 밥과 풋고추, 장아찌, 양념간장에 냉수 한 그릇을 차려온 것이다. 변변한 반찬도 없이 밥주발을 끌어안고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풍속화의 한 장면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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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은 집필자 소개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공저로 <1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가 있으며, <16세기 성주 지역 ..펼쳐보기

출처

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 저자한국고문서학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의식주’를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의미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생활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이를 구현했는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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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시대 밥과 반찬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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