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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농업의 중심은 논농사
우리는 어떤 농업 구조를 지니고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지형 구조는 산악으로 둘러싸여 전체 면적 중에서 밭이 논보다 훨씬 많았다. 개간과 간척사업으로 적지 않은 농토가 새로이 생겼으나 농경지의 대부분은 여전히 하삼도(下三道, 전라 · 경상 · 충청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농경지의 절대 면적뿐만 아니라 논과 밭의 분포 비율 또한 지역에 따라 편중되어 있었다. 15세기 농경지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20%, 밭이 차지하는 비율은 80%였다. 그리고 논의 80% 정도는 하삼도와 경기도에 분포되었다. 결국 논농사는 경기도와 하삼도에 편중되었으며, 강원도를 비롯한 북부 지역은 대부분 밭농사가 중심을 이루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경지 가운데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높아졌다. 19세기 말이 되면 전체 농경지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밭은 70% 정도였다. 이처럼 논의 비율이 높아진 것은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반답(反畓) 현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논농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수리시설이 확충되어 이런 현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개간사업도 논의 비중을 높이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전체 농경지에서 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쌀보다는 잡곡의 생산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밭에서는 1년에 농사를 두 번 지을 수 있었다. 16세기 말 충청도 임천에서 둔전각주1) 을 경영하던 오희문(吳希文)은 보리를 베어내고 콩과 녹두를 파종했으며, 17세기 중반에 경상도 영천과 칠곡에서 대단위 농업을 경영하던 이담명(李聃命)은 보리가 적당하게 자라길 기다려 조와 콩을 중간에 파종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보다는 논농사에 있었다. 쌀은 세금을 내는 단위였으므로 국가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실제 벼와 잡곡류는 경제 가치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다. 세종 때에는 논에서 생산된 곡물의 가치를 밭에서 생산된 곡물의 두 배로 평가했다. 이는 토지 수확량과 경작인의 실태를 기록한 이담명의 『추수기(秋收記)』를 통해서 확인된다. 이담명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100여 년 동안 농업 관련 사실을 철저히 기록했다. 이담명의 『추수기』를 보면 논은 철저히 관리한 반면 밭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했다. 또 밭 추수기는 작성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며, 기록하더라도 그 내용이 매우 허술했다.
수확한 작물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16세기에 전라도 해남과 담양에 거주하던 유희춘각주2) 은 쌀 83석과 보리 23석을 수확했다.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문건각주3) 은 당시 성주에서의 수확물을 『묵재일기(默齋日記)』에 기록해놓았는데, 1551년에는 벼 27석, 보리 7석, 조 15두를, 1563년에는 벼 41석, 보리 5석을 수확했다. 하삼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재배하던 것은 벼였으며, 이는 양반가의 수확물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잡곡은 지역에 따라 다소 편차가 있다. 전라도에서는 보리를 재배한 반면,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는 보리뿐만 아니라 조와 기장도 일정 비율로 재배했다.
하삼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강원도를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의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강원도 평강(平康, 지금의 철원)에서 둔전 경작을 하던 오희문은 자신이 얻은 수확물을 정기적으로 일기에 기록했다. 오희문이 평강에서 재배한 곡물 중에는 벼나 보리는 거의 없고, 대신 기장 · 조 · 차조 · 태 · 두 · 녹두 · 메밀 · 참깨 · 들깨 등이 주류였다. 특히 기장과 조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결코 작지 않았다. 또한 일정 규모로 메밀을 재배했는데, 이는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식이었다.
서유구각주4) 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기록했다. 이는 결국 남부 지역에서는 쌀이, 북부 지역에서는 조가 많이 생산되었음을 반증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의 견문기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도 이런 상황은 그대로 드러난다. 비숍이 체류하던 19세기 말 북부 지역에서는 여관에서 쌀밥 대신 조밥을 제공했다고 한다.
18세기 중반 이후로 이모작을 하면서 농민들은 더욱 많은 보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권상일각주5) 이 남긴 『청대일기(淸臺日記)』는 1740~50년대 경상도 상주의 이모작 실태를 보여준다. 이모작은 하나의 논에서 벼도 수확하고 보리도 수확하는 장점이 있지만, 지력이 소모되고 논갈이를 할 수 없으며, 모내기를 제때에 못하는 폐해가 있었다. 18세기 중반 경상도 논의 30~40%에서 이모작을 시행했으며, 기타 지역에서는 10% 내외였다. 그러나 소작을 하던 농민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익한 농업 방식이었다. 이모작을 하면 세금을 벼로 한 번만 내기 때문에 보리는 농민들이 모두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더라도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는 이모작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논과 밭의 규모와 토지 생산성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논에서 나는 쌀이 밭에서 나는 잡곡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벼는 동일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다수확 품종이었다. 근대적인 통계가 가능한 1910년의 상황을 보면, 전체 곡물 생산량 1,843만 석 가운데 쌀이 차지하는 비율이 44%(814만 석)였고, 나머지 곡류가 56%를 차지했다. 보리는 겉보리와 쌀보리를 합해 287만 석으로 16%를 차지했다. 이렇듯 쌀과 보리의 생산량은 약 3 : 1의 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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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를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의미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생활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이를 구현했는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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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시대 농업의 중심은 논농사 – 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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