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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없는 사회에서 나는 누구?
젊은 민족학자였던 피에르 마란다각주1) 는 연구 임무를 위해 태평양의 솔로몬제도 원주민을 찾아갔다. 구조상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것과 비슷한 사회를 이루며 숲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울이라는 물건에 익숙하지 않았다. 마란다는 부족민의 일상 속 다양한 상황을 사진으로 찍었다. 짧은 휴가 중 그 사진들을 현상한 마란다는 그들에게 돌아가 마을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원주민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어떤 노인은 자신의 오두막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매우 화를 냈다. 또 어떤 남자는 자신의 밭을 가는 남자는 누구냐며 투덜거렸다. 마란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이들은 사진 속의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이건 할아버지잖아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웃어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기 사진은 알아보지 못했다. 이 경험을 비롯해 유사한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거울이 없는 사회에서 자기 이미지란 자신이 볼 수 있는 부분, 즉 팔, 가슴, 성기, 다리 등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울을 마주보면 누가 누구를 쳐다보고 있는 걸까?
내가 거울 속의 얼굴을 볼까?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이 나를 볼까?
물론 흐르는 강물이나 호수와 물병 속의 잔잔한 물에서 어느 정도는 자기 이미지를 볼 수 있지만, 이는 흐릿하고 불안정한 이미지다. 게다가 그들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우리처럼 있는 그대로의 신체 이미지를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물론 장식이나 얼굴 분장, 문신 등은 그들에게도 꽤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몸 그 자체에 관여하지 않는다. 보다 원시적인 사회의 사람들이나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몸의 이미지는 얼마간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추상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한 카낙족 원주민이 프랑스에서 온 연구원에게 했던 "당신네(백인)가 우리에게 가져온 것은 육체였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피에르 마란다가 "오랫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완전한 이미지란 결국 '장식'뿐이다" 라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가면이나 장식, 장신구, 옷 등은 대체로 몸보다는 인식하기가 쉽다. 이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꼭 몸이나 얼굴의 진짜 이미지와 관계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확실히, 청동거울이든 유리거울이든, 거울의 기술적 발전은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바꿔놓았으며 우리가 외모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미지를 갖도록 해주었다. 그렇다고 소위 원시적인 솔로몬 제도 원주민들에게 자아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자아'는 우리와 달리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그리고 개별화된) 몸의 이미지와 큰 연관이 없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사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자아의 형성은 ‘현대식' 거울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과정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개성 형성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거울 단계' 라고 부른다.
타인에 의해 나는 만들어진다
‘거울 단계'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앙리 발롱이 처음 사용했지만, 1937년과 1949년에 있었던 회의에서 이를 정신분석의 중심 개념 중 하나로 발전시킨 사람은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었다. 그는 유아기에 ‘나라는 개념'의 형성을 ‘거울 단계'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는 여섯 달된 신생아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아기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다 서서히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뭔가 색이 있는 형태가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형체를 구분한다. 아기는 얼굴로 다른 이들을 인식하지만, 자신도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직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아기가 자신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이미지가 아닌 또 다른 아기로 받아들인다. 그 아기랑 놀려고 하고 손으로 때리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 이미지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거칠게 때리려고 하며, 울음을 터트리며 피한다. 정체성 형성 과정이 진행 중인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아기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인지하고 거울 속 이미지와 자신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데, 아기는 거울 속 이미지를 '그' 또는 제3자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나', ‘이건 나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과정을 ‘나라는 개념’의 형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왜냐하면 몸(특히 얼굴)의 이미지와 몸에 대한 자각과 ‘나'라는 대명사가 결합해 자아의 개념을 구축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현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동물들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반응을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예를 들어, 비둘기들은 새장 속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짝으로 인식해 번식에 대비하는 특정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이런 유인 장치는 유사형(類似型)에 기초해 작용한다. 비둘기는 거울에 비친 형태의 유사성과 같은 닮음에 자극을 받는다. 보다 복잡한 뇌를 가진 동물은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개나 코끼리, 유인원 같은 특정 포유류는 반사경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인지할 수 있다. 유인원의 경우 한쪽 뺨에 물감을 묻히고 거울을 보여주면, 거울이 아니라 자신의 뺨에 손을 가져가 그것을 닦아내려고 한다. 이런 실험은 이 동물이 자신의 몸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우리'처럼,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육체적 자아', 즉 몸이라는 경로를 관통하는 원시적인 종류의 자의식을 갖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인간에 있어서도 이는 복잡한 문제다. 라캉은 거울 단계를 정체성 형성과정으로 본다. 어린 아이는 이미지(혹은 이마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외부의 물체를 통한 자아 정체성 형성은 엄청난 정신분석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는 그 작은 인간을 상징의 영역으로 이끈다. 이는 큰 기쁨의 원천으로, 아이는 처음으로 그 이미지 안에서 자기 몸의 파편적 이미지들을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전까지는 자신의 형체적 존재(가시적인 신체 기관, 소화, 배변, 고통, 기쁨 등)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거울 단체를 거치는 동안 아기는 마침내 이마고와 함께 육체적 통합을 이루고, 이는 아기에게 기쁨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아동심리 전문 정신분석학자 프랑수아즈 돌토는 라캉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돌토는 거울단계가 아기에게 기쁨의 단계가 아닌 오히려 불안과 좌절의 단계라고 말한다.
돌토에 따르면, 아기는 최소한 출생 순간부터 (어쩌면 자궁 안에서부터) 자신의 몸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다. 그는 이를 몸의 무의식적 이미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IIC라고 부른다. ‘거울 단계' 훨씬 이전에, 아기의 후각과 본능적인 직관에서 발견되는 본래의 결합이 있다. 이것이 ‘원초적 자기애’의 원천이다. 돌토는 거울 단계를 시작이 아니라 몸과 상징적 자아를 결합하는 과정의 끝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 단계는 왜 그 작은 아이에게 고통이 되는 것일까? 라캉도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진전을 이루었는데, 사실 거울 단계는 상징적 구축이다. 아기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몸의 무의식적 이미지를 포기하고 그것을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와 단절해야 한다. 자신의 상상계를 외부의 신체적 이미지와 단절하는 것이다. 거울속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바로 나 외에 다른 이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단절은 최초의 상징적 거세, 즉 아기가 자신의 ‘단일성' 또는 최초의 개성을 발견하는 동시에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잃는 중요한 단계다. 그 작은 인간의 개성 형성 과정은 비둘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마주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이는 동형(同形)적이 아니라 이형(異形)적인 과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논의를 전개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거울단계'에서 말하는 ‘거울'에 관해 몇가지 분명하게 밝혀둘 것이 있다. 앞서 원시 사회, 특히 거울이 없는 사회에서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음에 따라 다소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울은 사물의 시각적 이미지를 되비추는 물리적인 물건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심리적 거울'에 가까운데, 예를 들어 성인의 목소리나 ("어머, 피터의 발이 여기 있네. 너는 얼굴이 정말 작코 귀엽구나" 등 그들이 하는 말) 타인의 몸짓, 접촉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그 과정에서 타자성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결정적인데, 그 이유는 아기가 스스로 ‘거울'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데다 언제나 소위 ‘대 타자(Big Other)' 라고 하는 존재가 함께해야 하며 , 그 존재는 대부분 엄마로 이상적인 자아상, 또는 나중에 되고자 하는 인간상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엄마의 모습, 다른 어른들의 모습,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다.
라캉의 말에 따르면, 거울을 볼때 아기는 앞에서 보았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인지하기 전에 다른 이들의 이미지부터 인지한다.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서 아기는 거울 바로 앞에서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아이로 인식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아직 자신에게 얼굴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다른 이들의 얼굴만을 볼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체성과의 관계나 자아의 구축이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얼굴이 내 것이 되는 것은 내가 세상과 거울에서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엄마는 내 앞에서나 거울 속에서나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이 거울을 흉내내기, 거리두기 장치로 인식하는 첫 단계다. 또한 내 얼굴이 내것이 되는 이유는 다른 이들이 내 얼굴을 보고 ‘말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모습은 라캉 이론의 핵심 개념이 된다. 내 몸의 이미지는 다른 이들이 상상한,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는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 모습은 내게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이며 가장 자기애적인 면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거울 단계가 사회화의 첫 단계인 이유다. 그리고 이 주제가 얼마나 사회적인 개념인지, 얼마나 다른 이들의 존재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이 모든 모험은 바로 그 다른 이의 모습과 '단절'됨으로써 시작된다. 이는 앞서 만났던 다른 단절을 상기시킨다. 고르곤과 옹녀 , 변강쇠, 디오니소스, 이 모든 인물들과 마주치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단절된다. 일반적으로 가면이 그러한데, 가면은 일단 착용하면 마치 영에 사로잡힌 주술사처럼 우리가 정체성을 잃고 잠시 다른 성격을 띠게 만든다. 가면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단절이다.
나는 거울을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 사회에서의 이형(異形)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여성에게 있어 거울의 기능'을 다룬 시몬 드 보부아르의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화장을 하거나 옷을 입기 위해 거울 앞에서 일정시간을 보낸다. 여성의 바쁜 하루 생활 중 드물게 사적인 시간의 일부다. 비밀스러운 자신의 방에서, 프랑스어로 ‘프시쉬(psyche, 영혼)'라고 하는 것 앞에서, 거울이 마치 영혼으로 통하는 관문인 양, 여자들은 자신을 발견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만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물론 그녀가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것은 평생 구축해온 사회적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대적 문화 코드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는 그 이미지를 확인하고, 그 이미지에 공을 들이고, 또 한편으로는 더 나아 보이려고 애쓰는데,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 확인받기 위해서다. 그녀는 거울 속 이미지를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상에 부합시키려 애쓴다. 이때 거울의 기능은 정확히 백설 공주 이야기에서 사악한 새엄마가 마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거울아, 거울아, 이 왕국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지?" 하고 물을 때와 같다. 새엄마는 거울에게 그 이미지를 확인(또는 부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확인 과정에서 얼굴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왜 거울을 볼까?
이런 이유로, 이슬람 세계의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것은 자아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여겨 진다. 몸의 이미지가 큰 의미를 갖는 서구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또 흥미로운 점은, 서구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시된다. 여자들만의 특권인 셈이다. 설사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유지해야 할 자산이라고 의식하는 ‘메트로섹슈얼, 세대와 함께 남자들도 변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그 유명한 나르키소스 신화에 뿌리 깊이 박힌 오랜 금기는 여전함을 알 수 있다. 나르키소스는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매료된 나머지 물에 빠져 죽는다.
스위스의 여성주의 사진작가이자 화가인 플로랑스 앙리의 작품은 우리사회에서 '거울'이 갖는 힘을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찍은 유명한 1928년도 작품에서, 그녀는 거울이 자신에게 남성 지배의 도구로 작용하는 방식을 해체하고자 했다.
여성이 거울을 통해 보는 이미지는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남자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환상,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다. 1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거울을 하나의 ‘장치'로 보는 이 유의미한 고발적 시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몸의 외적인 모습에 매료된 탈근대 사회에서 거울은 전보다 더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증명하는 도구다. 새로운 '데카르트적' 명제 “나는 나를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정도다. 현대식 거울은 사실 어디에나 있다. 지하철이나 건물 로비, 사무실 등에 있는 진짜 거울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거울의 목적은 내 이미지가 ‘올바른'지, 내가 사회에 비쳐지고자 하는 이미지와 부합하는지, 더 나아가 사회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 이미지와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거울은 다른 이들이 자기 검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내면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제어 장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훨씬 흔하고 추상적인 거울을 갖고 있다.
현대의 기술을 통해 우리가 거울로 사용하는 모든 스크린을 생각해보자. 블로그나 마이스페이스의 홈페이지,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모두 우리 자신의 이미지는 물론 다른 이들의 이미지까지도 선보이는 ‘무대'다. ‘구경거리'를 원하는 시대에, 자신의 이미지를 이렇게 사이버 공간으로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오락거리이자 자신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다. (휴대전화나 안드로이드폰, 아이터치, 미니 노트북 컴퓨터 등)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스크린을 통해, 이런 장치들은 사실상 탈근대적 거울로 작용한다. 하지만 거울은 다른 이들의 거울, 다른 이들의 자아상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더 이상 누가 누구의 이미지를 제어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현대적이고 다분히 바이러스적인 패턴 속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아트 큐레이터 클로드 페트리의 말처럼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방법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또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을 선택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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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얼굴의 모든 것을 다루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와 가면 등의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철학과 정신분석, 미학, 인류학 등의 관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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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얼굴에 대한 의식을 바꾼 거울 – 얼굴,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 저자 벵자맹 주아노, 옮김 신혜연,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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